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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지(알면 쓸만한 신박한 지혜)

#3-8. 한국 교육을 생각한다(3)

by 느티나무곽교수 2023. 8. 21.

서울대학교를 바꾸자? 어쩌면 이것은 대한민국에서는 불가론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름이 살 안된다'는 속담처럼 환부가 있다면 도려내야 하고, 잘못된 것이 있다면 고쳐나가야 한다. 가능하면 그 충격은 적을수록 좋다. 사족 떼고 오늘은 본론부터 얘기하기로 한다.

1. 서울대학교를 수정하자.

예나 지금이나 입학 시즌이 되면 나라가 온통 서울대 얘기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소위 '서울대 위에 의대'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는 정도이다. 필자는 지난 회에서 전국의 광역 시도에 국립대학 하나씩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국공립화 해서 2 모작 대학으로 바꾸자는 제언을 하였다. 덧붙여 그 명칭을 모두 서울대학교로 바꾸는 거다. 서울대학교 부산캠퍼스, 서울대학교 광주캠퍼스 이런 식으로. 서울대학교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이 많다면 그냥 한국대학교로 바꿔도 좋다. 그리고 각각의 캠퍼스를 특성화시키자. 

 1-1. 기초학문만을 전공하는 대학원대학교로

모든 학문 영역에서 통섭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쏟아진다. 그동안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던 문과 이과의 영역 분리도 서서히 사라질 모양이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하는 목소리는 기초학문 분야다. '문사철'로 지칭되는 기초학문 영역이 살아나지 않고는 응용학문이 살아날 방법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은 먹고사는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그거 전공해서 밥은 먹고살겠냐?' 하면 답이 없다. 그래서 국립대학에서 맡아야 한다는 거다. 과학 분야도 마찬가지다.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etc. 통섭은 그다음에 찾자. 생물학과면 그것으로 끝이다. 분자생물학을 하던 미생물학을 하던 모든 영역이 그 안에서 교류되고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 지금처럼 교수의 전공에 따라서 학과이름이 바뀌고 전공이 갈라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나머지 응용학문 영역은 현재 80%가 넘는 사학에 맡겨도 좋다. 이게 어렵다면 각 지방에 있는 서울대학교 캠퍼스마다 전공영역을 특성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1-2. 학생 처우개선 

서울대학교는 전액 국비로 운영된다. 입학금도 수업료도 없고, 생활비도 IC카드로 만든 학생카드로 일정액을 매달 충전시켜 사용한다. 전국 어디를 가든 교통비도, 숙박비도 공짜다. 왜냐고? 이들은 앞으로 국가발전의 동량이 될 중요한 인재들이니 이 정도의 대접은 받아야 한다. 공부하기에도 바쁜 학생들이 아르바이트걱정, 돈걱정을 하게 해서는 안된다. 이들에게 들어가는 돈은 장차 이들이 국가를 위해 기여할 것을 감안하여 미리 지불하는 기회비용이다. 필자가 대학원 박사과정을 할 때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역시 문헌을 수집하는 일이었다. 인터넷이 고도로 발달되고 네트웤이 잘 이루어진 오늘날의 학생들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절판된 책 한 권을 찾기 위하여 하루종일 청계천 고서점가를 뒤져야 했고, 때로는 국회도서관부터 시작해서 내로라하는 장서와 문헌을 소장하고 있는 연구소나 대학들을 지인들의 소개를 받아 방문 출입증을 만들고 며칠씩 뒤져서 복사신청을 하고, 빠르면 1주일, 늦으면 몇 달 후에 박스에 담긴 소포로 받아보는 일이 최선이었다. 비용도 문제거니와 시간과의 전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도교수님이 모교인 미국의 코넬대학에 몇 달간 방문교수로 가시게 되었다면서 필요한 문헌이 있으면 목록을 달라고 하셨다. 복사해 주시겠다는 거였다. 평소 독서카드를 애용하고 기록을 잘해왔던 나는 바로 목록을 전해 드렸고, 다음학기 교수님이 귀국을 하신 후 두 달쯤 지나서 라면상자 다섯 개 정도의 소포를 받을 수 있었는데, 그게 모두 무료서비스란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교직원이나 대학원생이 필요한 문헌을 복사하는데, 왜 돈을 내야 하는 거냐는 것이었다.

1-3. 임금체계를 고쳐야한다.

이렇게 들어간 대학 졸업생들에게는 4년간 공부한 만큼 월급을 더 준다. 대신 조건이 있어야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취업을 한 사람도 4년 정도의 경력을 쌓으면 대학졸업자와 동일한 보수가 주어져야 한다. 물론 취업해서 일하다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대학에 갈 수 있어야 하고, 기회 조건은 똑같이 주어져야 한다. 그러자면 현재 진행형인 계약직, 인턴제도 이런 것은 다 없어져야 한다. 이렇게 되면 사업주들의 불만이 높아질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창업을 한다면 동일한 조건이 되니 마찬가지다.

2. 평생 현미경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생계에 지장이 없는 나라

대학원 석사과정을 할 때의 일이다. 전공 특성상 실체 해부현미경을 통하여 미세한 표본을 들여다보면서 슬라이드 표본을 만들고 이것을 다시 고배율 광학현미경을 보면서 분류동정을 해야 하는 매우 지루하고 그야말로 막노동에 가까운 작업을 해야 하는 고단한 과정이 반복되었다. 때로는 하루 16시간 이상 표본제작에 매달리기도 하였고, 총 3만 장이 넘는 슬라이드 표본을 만들었다. 덕분에 석사과정을 졸업할 무렵에는 심한 난시가 와서 안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에 내가 전공하는 영역의 세계적 석학 중의 한분이 헝가리 자연사박물관의 부관장으로 계시는 Balogh 박사님 이셨는데, 내가 몸담고 있던 학회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실 기회가 있었다. 학회일정이 끝나고 지도교수님의 초청으로 우리 대학을 방문하여 강연과 워크숍을 할 기회가 있었다. 나름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그동안 만들었던 표본 중에서 미처 동정이 되지 않은 것 들 중에서 표본제작이 가장 잘 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을 고르고, 적당한 시간에 지도를 받을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표본 만드는 일이 어렵지요? 단순한 일이고,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서 더욱 그렇답니다." 하시면서 온화한 미소를 얼굴에 띠우시고는 당신이 가지고 오신 표본 몇 점을 보여 주시는 것이었다.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토록 놀랍고 창피할 수가 없었다. 박사님의 표본은 그대로 책에서 보던 그림 그대로였다. 표본은 흩어짐이 없었고, 표본을 만든 매물의 흘러내림도 없었다.

대화를 통하여 알아낸 몇 가지는 그랬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이때까지 30년 이상을 이 일만 해 왔다. 학교와 박물관만을 오갈 뿐 정부부처에 예산을 따고, 로비를 하고 하는 일은 없다. 가족의 생계 걱정도 없다. 오히려 너희 나라에 와서 내가 너무 놀랐다. 서울도 아니고 지방에 있는 대학 연구실의 현미경이 우리 박물관의 현미경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다. 너도 이 분야를 평생 연구하여 인류사적 업적을 남기기를 바란다." 뭐 이런 거였다.

4. 입시는 고등학교 졸업시험으로 끝내자.

 1-1. 고등학교 졸업시험은 대학입학 자격시험

유치원부터 계산한다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은 최소한 12년 이상의 재도권 교육을 받은 셈이다. 그렇다면 기본적인 문해력은 물론 사회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수학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집단생활에 필요한 토론과 협상, 하나의 주제를 놓고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 내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능력은 갖추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것이 가능한지를 가늠하는 시험을 치르게 하자. 한 번에 합격하고 졸업하는 학생도 있을 것이고, 여러 번 시험을 치러야 하는 학생들도 생길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 자료는 그동안 수차례 강연을 통하여 알려진 김누리교수의 독일식 교육제도를 참고하면 될 것이다.

 1-2. 대학은 무시험진학 유시험졸업

아마 이 정도 얘기를 읽은 분이라면 대학에 진학할 사람과 고교졸업 후 취업할 사람이 나뉠 거라는 점에 인식을 같이 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작문과 토론이 전혀 되지 않는 학생들이 대학을 가서 마음고생 하는 것보다는 보다 일찍 진로를 결정하여 직업 전선에 나서도록 사회적 함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여기에는 학부모의 의식 개선이 우선되어야 하고, 그에 앞서 사회적 시스템이 더 이상 '대학교는 나와야 한다'는 분위기로 흘러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5. 대학원 시절의 추억 하나

정말 다니기 싫은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나마 잘했다고 생각되는 것은 대학원 진학을 했다는 점이다. 공부가 재미있어졌다는 얘기다. 그 계기에 대해서는 다시 얘기할 기회를 갖겠지만, 대학에 다니면서 달라진 점을 나이가 한참 어린 동료학생들과의 비교에서 찾았다.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에서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어려서부터 무섭게 빠져든 독서습관이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할 줄 몰랐다. 그것은 책을 읽거나 논문을 읽거나 모든 것을 독서카드 한 장에 정리를 하는 버릇이었다. 거기에는 책 또는 논문의 제목과 저자, 출판 연도, 출판사, 등 기본적인 것들을 적고, 전체 핵심 내용을 요약하여 적어두는 것이었다. 필요시 그 책이나 논문에서 인용한 문헌 같은 것도 적어 두었고 카드의 왼쪽 모서리에는 대분류를, 오른쪽에는 소분류를 위한 표시를 형광펜으로 해 두었다. 그리고는 분류 색인별로 모든 카드를 알파벳 순으로 정리해 두는 것이었다. 이것은 글을 쓸 때도, 토론을 할 때도 매우 유용했고, 특히 세미나나 토론 수업이 많은 대학원 수업과 과제물 작성에서는 그야말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언제라도 주제가 주어지면 2시간 이내에 글 한편을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인터넷이 일상화되고, 엑셀로 자료를 정리하고, 심지어는 Chat-GPT가 보고서를 만들어주는 요즘에 와서야 뭐 전설 또는 화석이 되어버린 얘기지만 당시 대형 캐비닛 하나를 가득 채운 이 독서카드야말로 필자에게는 황금의 열쇠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1980년대 말, 당시만 해도 타자기 또는 손글씨로 논문을 작성하고, 수정하고 다시 심사받고 하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누구도 믿어지지 않을 테지만, 당시에 국내에는 "삼보####"이라는 286 AT컴퓨터가 처음 보급되기 시작했고, 외장하드 20메가바이트(20 기가바이트가 절대 아니다)에 3.5인치 디스켓을 꽂을 수 있는 슬롯이 붙어있고, 도트프린터가 달린 첨단 컴퓨터를 보는 순간 무조건 질러버렸다. 그 당시 지방의 소형아파트 전셋값에 버금가는 거금이었다. 그리고는 "한글과 컴퓨터"라는 창업회사에서 출시한 아래아한글 워드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문서를 작성하고 제출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박물관에나 가야 할 수준의 문서작성기에 불과했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필요하니까, 정말 절실했으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힘들었던 그 시절 3년 동안 연구장학금을 지급해 준 한국과학재단 측에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6. 마무리

대학입시에 목을 매는 학교교육으로는 더 이상 선진국과 어깨를 겨룰 수 없다. 기초학문 분야에 대한 획기적인 개선과 지원을 시작으로 정말 대학에 가야 할 사람과 공부하기 싫은 학생들을 분리하여 자유롭게 일자리를 찾아 재미있게 일하도록 만들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