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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지(알면 쓸만한 신박한 지혜)

#3-6. 한국 교육을 생각한다(1)

by 느티나무곽교수 2023. 8. 10.

[한국 교육의 미래 이대로 좋을까]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가. 유난히 무덥고 비도 많이 오고, 힘겨운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구는 사건들이 짧은 기간에 일어났다. "교육자"라는 준엄한 천직에 발을 디딘 교사가 교육현장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고, 학생이 교사를 폭행하고, 학부모가 교사를 폭행하는 무자비한 일들이 미국의 대통령이 "본받아야 한다"라고 외친 한국의 교육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다. 길은 과연 없는 것일까? 

1. 한국 교육의 현주소

 1-1.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 하나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1960년대 중엽 새로 발령받아 오신 여선생님께서 담임을 맡으셨다. 선생님은 빼어난 미모도 아니었고, 좋은 옷을 입지도 않았으며, 그저 수더분한 외모에 친근한 미소로 아이들을 지도하셨다.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는 것은 선생님은 부임하시자 마자 우리 교실 칠판 양쪽 벽에 높은 책꽂이를 설치하시고 선생님의 소장 책들을 빼곡하게 채워 놓으셨다. 문화적으로 완전히 변방에 버림받은 우리에게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셨고, 1주일 단위로 2인 1조로 돌아가면서 맡는 당번들이 대출장부를 맡아서 정리하도록 자율적인 학급 도서실을 운영하셨다. 놀랍게도 그 시절만 해도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가 아니면 공부가 아니라고 하던 부모님들이 많은 상황에서 이것은 천지가 개벽할 만큼 엄청난 충격이었다. 소년삼국지부터 시작하여 한국문학전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을 접할 수 있었고, 내 인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스승이었고, 오늘날까지 글 쓰고 강의하며 학문의 길을 걷도록 인도해 주신 고마운 분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집에 가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아버지의 반응은 의외였다. 직접 대놓고 나에게 하신 말씀은 아니었으나 어머니와 하시는 말씀을 얼핏 들었다. "박봉에 무슨 여유가 있어서...." 하시며 뒤끝을 흐리셨다. 그때만 해도 선생님들의 경제적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었는지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뜻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렴풋이 선생님을 걱정해 주시는 것으로 이해를 했다.

 1-2.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 또 하나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서 사범학교를 갖 졸업하신 멋쟁이 남자선생님이 새로 부임을 하셨고, 우리반 담임을 맡으셨다. 당시 한 학년이 2개 반까지 있었고, 한 반에 40여 명의 학생들이 있는 시골의 작은 초등학교라 선생님들은 2~3년 단위로 전근을 가셨다. 우스운 얘기로 전 국민이 평등하게 가난하던 시절이었고, 학교가 끝나면 미국의 잉여농산물인 밀가루나 옥수수가루, 전지분유 같은 원조물자를 교사-校舍의 뒤에 있는 창고에서 '소사'라고 불리는 아저씨가 학생들에게 한 바가지씩 나누어 주었고, 아침 등교할 때 준비해 간 종이봉투에 받아서 집에 가지고 가면 어머니들은 그것으로 죽을 끓이거나 전지분유를 끓여서 가족들이 나누어 먹곤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4,5, 6학년이 되면 오후에도 수업이 있어서 학교의 창고 옆에 간이 급식소를 만들고, 커다란 가마솥을 걸고 죽을 끓여서 각 반별로 커다란 양동이로 퍼다가 담임선생님의 지도하에 나누어 먹이는 단체급식을 하였다. 급식소에 가서 죽을 타오고 나누어주고 하는 일들은 그날의 당번들이 담당하였지만, 죽을 타오는 일은 반에서 키도 크고, 덩치도 큰 아이들이 몇 명 함께 가서 타오곤 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제 나이에 학교에 입학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적게는 1~2살에서 많게는 3~4살까지도 차이가 나는 경우들이 많았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께서는 당시에 반장을 하던 나를 부르시더니 오십환짜리 동전을 하나 주시면서 '사카린'을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셨다. 당시만 해도 하얀 설탕은 산골에서 구경하기 어려운 귀한 물건이었고 사카린, 당원 같은 이름으로 불리던 것들을 저울에 달아서 팔던 시절이었다. 그날은 마침 5일마다 돌아가며 서는 장날이었고, 평소 어머니를 따라서 자주 가던 우리 반 친구의 어머니가 하시던 가게로 달려가서 사카린을 달라고 하였다. 친구의 어머니는 날 기억하고 계셨고, 학생들 죽 먹는데 넣을 거라고 담임선생님 심부름이라고 하니까 '그럼 많이 주어야겠네.' 하시면서 신문지를 접어 풀로 붙인 봉투에 사카린을 담아 주셨다. 기다리는 친구들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가서 먹여야 한다는 마음에 정신없이 달려 교실에 들어갔는데, 사카린 봉투를 열어보신 담임선생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시더니 나의 뺨을 사정없이 때리시는 것이 아닌가. 영문도 모른 체 비틀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똑바로 서서 "선생님! 왜 때리십니까?"라고 큰 소리로 물었다. 나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갔으리라.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 심부름을 다녀온 학생에게 다짜고짜 뺨을 때리는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었고, 억울한 마음이 앞섰다. 그러자 선생님은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나쁜 녀석 같으니라고, 어디서 못돼 먹은 손버릇이야? 오 십환어치 사카린이 이것밖에 안된단 말이야?" 하시는 게 아닌가. 기질 탓이었으리라. 야무지게 말했다. "그럼 제가 사카린을 훔치기라도 했단 말씀입니까? 정 그렇게 의심스러우시면 다른 아이에게 심부름을 한번 더 시켜 보시면 되겠네요." 그러자 선생님은 정말 다른 아이를 부르더니 다시 오 십환을 주시면서 다시 심부름을 시키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돌아온 그 아이의 사카린은 내가 사 온 사카린 보다도 양이 훨씬 적은 것이었다. 

1-3.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 하나

고등학교시절 교감선생님은 참 엄격하신 분이셨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시던 분이셨다. 금이가서 깨지기 쉬운 유리창, 위험한 난간, 구석구석의 휴지조각들 모두 선생님의 몫이었다. 늘 수첩을 들고 다니시며 점검하고, 적고, 때로는 손수 보수도 하시곤 하셨다. 1960년대 말이었으니 모두가 힘든 시기였고, 3개월에 한 번씩 내야 하는 수업료는 연체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담임선생님들은 조회나 종례시간이면 수업료 독촉하는 것이 상례였다. 어느 날 중간고사를 치르는 기간이었다. 수학시험 시간이었는데, 갑자기 교실문이 열리더니 지금의 행정실장에 해당하는 서무과장님이 들어오시는 거였다. 그러더니 몇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더니 모두 일어나 나가라고 하신다. 가서 수업료 가지고 와서 시험을 보라는 거다. 시험을 보다 말고 교실에서 쫓겨 나왔고, 복도에 우둑커니 서서 창밖을 쳐다보고 서 있는데, 교감선생님께서 다가오시더니 따라 오라신다. 교무실에 들어가니 말없이 한참을 앉아 창밖을 바라보시더니, "집에 전화가 있는 사람은 이 전화기로 전화를 해라"하시며 교감선생님 책상 위의 전화기를 가리키신다. 몇 사람은 전화를 하고, 교실로 들어가고, 그나마 집에 전화가 없는 사람은 전화도 못하고 서 있었다. 한참만에 2층 복도가 조용해 지자 선생님은 "조용히 들어가서 시험들을 마저 보아라. 시간이 부족하겠지만 부족한 대로 열심히 들 풀어라."고 하신다. 집중이 안되었다. 다음날도 시험이 있는데, 그날밤 늦게까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교감선생님께서 부르신다. "상담실에 근로장학생 자리가 하나 비었는데 해 보겠냐? 낮시간에 상담실 선생님들 상담하고 나면 상담실에 비치된 자료들을 정리하고, 상담실 청소를 하는 비교적 힘들지 않은 일이야. 조건은 수업료 면제를 해주는 거고" 울컥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당시에 우리 학교에는 성적은 좋은데, 학비 마련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이런 근로장학생 제도를 많이 운영하고 있었다. 도서실, 교내매점 등등 필요하다 싶은 곳에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교감선생님의 일이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군복무를 마치고 뒤늦게 복학을 하여 대학을 다니던 때인데, 교장선생님이 되신 선생님은 '호헌철폐 직선제 개헌'을 외치며 학생 시위를 하던 후배들이 처벌을 당하게 되자 '모든 책임은 교장인 나에게 있다.' 하시며 학생들을 보호하는 조건으로 학교를 떠나셨다. 

2. 책임을 지는 관리자

시골의 작은 초등학교. 교실이 모자라서 때로는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하고, 교장실도 따로 없이 교무실 한켠에 함께 있던 시절이었다. 마침 우리 교실은 얇은 판자를 얼기설기 이어 붙인 칸막이로 교실을 나누어 한쪽은 교무실로 사용하는 바로 옆에 있었고, 우리 교실에서 조금이라도 큰소리가 나면 교무실까지 다 들리는 그런 상황이었다.

 2-1. 정말 학생이 억울한 시절

너무 억울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무어라 따지고 대든다는 것은 상상 할 수조차 없는 시절이었으니까. 담임 선생님은 아무런 사과의 말씀도 없이 '자리로 들어가'라고 하셨고 내 속마음에서는 '미안하다고 한마디 정도는 해야 되는 거 아냐?'라는 서운함이 너무 컸다. 말없이 내 자리로 돌아와 책들을 꺼내어 보자기에 싸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책가방이라는 것이 반에서 한~두 명 있을까 말까 한 시절이었다. 면 소재지에서 제일 부자라는 양조장집 아이들, 면장이나 지서장, 우체국장 같은 소위 지역 유지들의 자녀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커다란 보자기에 책이며, 학용품이며, 심지어 도시락까지 모두 함께 싸서 들고 다녔으니까. 아무튼 책보자기를 싸서 떠억 하니 어깨에 둘러메고는 교실을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등 뒤에서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같으니라고! 돌아오지 못해~!' 하는 담임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와 버렸다.

2-2. 선생과 스승

지금 보면 손바닥만한 운동장이었지만 어린 시절 산골 마을에 가장 넓은 곳은 초등학교 운동장이었다. 그 넓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데 머릿속에는 온통 '억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운동장 중간쯤 왔을 때 뒤에서 누가 달려와 내 손을 잡고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러면서 "억울하지~? 화가 많이 났구나~!" 하는 남저음 목청의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고, 그분은 바로 교감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말없이 내 손을 이끌어 운동장 끝자락에 있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그늘 밑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는 한동안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교실에서의 상황은 이미 다 파악하고 계셨던 선생님은 상황에 대한 질문은 한마디도 없으셨다. 어느 만큼 마음이 안정되기를 기다려 조용히 물어보셨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려고?" 나의 대답은 단호했다. "집에 가야지요."그러자 "왜?"하고 다시 물으셨다. "배울 게 없는 학교를 다녀서 무얼 하겠어요. 그만 다닐랍니다." 한참을 기다리던 선생님은 "그럼, 지금 가지 말고, 교무실 가서 나랑 함께 있다가 학교 끝나는 시간에 집으로 가거라. 그리고 집에 가서 한번 더 생각해 보고, 생각이 내키면 다시 학교에 오너라. 중학교 가려면 학교는 졸업을 해야지!" 하셨다.

3. 관리자인가 책임자인가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직급들이 있다. 평교사로 정년을 하시는 선생님도 계시고 교감, 교장, 장학사, 장학관 등 보직에 연연하는 선생님들도 자주 본다. 대학에서도 연구나 교육보다는 보직에 연연하는 교수들,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교수들이 많이 있다.

 3-1. 생각이 바뀌어야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

교감선생님과의 어색한 시간을 뒤로하고 아무렇지 않게 집으로 향했고, 그날따라 늦게 퇴근하신 아버지는 저녁을 먹고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잠이 든 내 뺨에 이상한 느낌에 어렴풋이 잠이 깼는데 아버지가 뺨을 어루만지시며 지긋이 바라보고 계셨다. 난 계속 자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엄격한 편이셨던 아버지의 꾸중을 들을 것을 염려했었는데, 억울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며 눈물이 났다. 나중에 한참 나이 들어 들은 얘기지만, 그날 교감선생님은 나를 집으로 보내고 학교 밖으로 나가셔서 아버지를 만나 낮에 있었던 상황을 설명하고, 경험이 부족한 신임 교사를 잘못 지도한 자신의 불찰이라고 깊이 사과를 하셨고, 아버지는 자식을 잘못 가르친 당신의 잘못이라고 서로 사과하며 막걸리 한 사발을 나눠 마시고 해어지셨단다. 물론 그 자리에 담임선생님은 동석하지 않으셨고, 다음날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아침에 학교에 가자마자 담임선생님께 찾아가 "어제는 제가 버릇없이 굴어서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를 했다. 선생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고 그 후로도 지금까지 사과의 말씀을 듣지 못했다.

 3-2. 완벽한 시스템은 없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하다. 아무리 인격적으로 부족한 분이라도 선생님은 학생들을 지도하는 사표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나면 교감, 교장, 교육장, 교육감은 뒷전에 숨는다. 학부모들은 직접 담임선생님께 전화하고, 학교를 찾아가 항의하고, 언어로 때로는 행동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고소까지고 불사한다. 학폭사건이 벌어진 학교의 담임선생님께 정신적 피해보상을 하라는 학부모의 요구에 못 견뎌 휴직을 하고 군입대를 한 선생님께 군대까지 피해보상하라는 통지를 보내고, 교장 교감선생님은 보상을 해 주라는 연락을 하고, 결국은 이를 견디다 못한 젊은 선생님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는 데도 대부분의 언론에 보도가 안된다. 이래도 되는 걸까?  교장선생님은 학교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최종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폼 잡고 앉아서 결재나 하고, 거드름이나 피우는 사람이 아니다.

4. 그래도 길은 있다.

가장 먼저 변해야 하는 것은 학부모들이다. 학생 인권보호법은 원래 가정의 폭력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자는 취지로 생겨난 법이다. 내 자식이 잘못하여 교실의 분위기가 엉망이 된다면, 교권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학생들의 학습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사례가 된다. 문제 되는 학생이나 학부모는 가칭 "학교접근금지법" 같은 것을 만들자. 그래서 학교로부터 분리를 시키고, 다른 학교로의 전학도 안된다. 그래도 해결이 안 된다면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 그 많은 섬 하나 딱! 지정해서 이런 아이들과 학부모들만 위리안치시키는 법을 만드는 거다. 그 안에서 무엇을 하든 그들 마음대로다. 그러나 한번 그 섬에 들어가면 65세 경로인이 되기 전에는 나올 수 없고, 출국도 금지다. 다음으로 변해야 하는 것은 교장, 교감선생님과 교육장, 교육감이다. 그 자리는 교사들 지도감독하라고 주어진 관리직이 아니다. 분명히 그자리는 교사들이 교육활동을 원만하게 잘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어려움을 해결하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고 최종적 책임을 져야 하는 봉사직이다. 교사에서 교감으로, 다시 교장으로 승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런 일들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선발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우선 이 두 가지부터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