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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지(알면 쓸만한 신박한 지혜)

#3-2. 한국의 전통 이불-미신인가 과학인가

by 느티나무곽교수 2023. 7. 17.

[한국의 전통 이불-미신인가 과학인가]

한국의 전통적 주거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온돌과 이부자리이다. 오늘날은 대부분의 가정에서 보일러를 사용하면서 온돌의 구조도 바뀌고, 이부자리 또한 화려하게 바뀌었지만,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계급에 따라서 의복과 이부자리까지 법으로 규정을 하여 따르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복식 규정을 일부 몰지각한 식민사관에 찌든 사람들은 미신으로 치부하고 있다. 과연 이것은 미신일까, 과학일까?

1. 이부자리의 형태

중국에서 목화를 도입하여 재배하고 솜을 다루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특히 겨울철 보온과 난방에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으며 전통적인 이부자리 또한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그 형태를 보면 안에 얇고 넓은 천으로 감싼 두꺼운 솜을 직사각형으로 넣은 솜이불 안감을 준비한다. 그리고는 바닥에 하얀색의 넓은 천을 펼치고 그 위에 솜이불 안감을 펼쳐 놓는다. 그리고는 윗부분에는 안감크기와 거의 비슷한 크기의 검정색 또는 청색의 또 다른 천을 댄다. 이때 바닥에 펼쳐진 천은 안감보다 사방으로 30~40cm 정도 더 넓은 것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옆으로 나온 천으로 윗부분에 댄 검정색 천위에 겹쳐 감싸고 바느질을 하여  이불의 형태 유지와 솜이불 안감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추운 겨울철 두꺼운 솜을 세탁하여 말리기 여렵기 때문에 이렇게 이불을 만들어 놓으면 주기적으로 겉을 감싸고 있는 천만 벗겨서 세탁을 하고 말려서 다시 씌우면 깨끗한 이불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만든 이불의 검정색 홑청 한쪽에는 반드시 가로 90~100cm, 세로 10~15cm의 붉은색의 천조각을 대고 바느질을 하여 눈에 띄게 만들어 놓았다.

한국의 전통이불-필자 그림
한국의 전통이불-필자그림

2. 이부자리의 기원

이러한 이부자리의 기원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본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보면 신라의 향가-鄕歌 25수가 전해 오는데, 그중에 "처용가"라는 글이 있다. 처용이 지었다는 시인데 "셔블 발긔 달에 밤그슭이 노니다가, 도라와 자리보곤 바랄이 네히어라, 둘은 내헤엇고 다른 둘은 뉘헤런고, 본디 내헤라마날 아사날 엇떠하리잇고"라고하는 시다. 이를 해석하자면 "서라벌 달 밝은 밤에 밤늦도록 놀며 다니다가, 집에 돌아와 잠자리를 보니 발이 네 개 로구나, 둘은 내 것이었고 다른 둘은 누구의 것인고, 원래 내 것이었지만 빼앗긴 후이니 이를 어찌할꼬"하는 내용이다. 그리고는 처용이 마당에 제단을 펼치고 춤을 추며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당시 무당-sharman이었던 처용은 얼굴이 온통 붉고 울퉁불퉁하여 무섭게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오늘날에도 울산지방에는 처용무와 그를 상징하는 탈-mask이 전해 온다. 그는 집안을 잘 보살피지 않았던 모양이다.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 시내에 나가 밤늦도록 술마시고 놀다 늦게 집에 와 보니 부인이 천연두에 걸려 심하게 앓고 있었던 것인데 이것을 마마귀신과 동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의인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무당이 할 수 있는 일은 귀신을 몰아내기 위해 마당에 단을 차리고 굿을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일로 인하여 감동한 귀신이 처용 앞에 엎드려 사죄하며 "앞으로 당신이 있는 곳에는 절대 내가 침입하지 않겠다. 그러니 당신이 있다는 표시로 붉은색을 표시해 두어라"하며 떠나갔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붉은 색은 귀신 즉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상징이 되었다.

3.이부자리를 덮는 규칙

이렇게 만들어진 이불은 반드시 붉은색 천을 댄 쪽을 목-neck 쪽으로 가도록 덮고 자야 한다는 것이 법칙이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밤에 잠을 잘 때 '마마귀신'이 사람의 목을 타고 들어온다. 그런데 마마귀신은 붉은 색을 무서워하여 도망을 간다고 하였다. 이 마마귀신은 오늘날의 천연두를 말한다. 이게 과연 과학적 근거가 있는 얘기일까?

4.이부자리에 숨겨진 비밀

 3-1)만들기 어려운 이부자리

섬유산업이 발달된 현대에 와서 보면 이건 상상 할 수도 없는 복잡하고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형 백화점이나 이부자리 전문 상가에 가면 화려하고 예쁜 이불들이 넘쳐나고, 말 할 수 없이 깨끗한 주거환경은 굳이 이불의 위 아래를 구분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화려한 현대의 이불-by Mark Marins in Pixabay
화려한 현대의 이불-by Mark Marins in Pixabay

그러나 모든 섬유를 수공업으로 집에서 짜고, 염색을 해야 했던 조선시대라면 이것은 상당히 귀찮고 시간만 낭비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국민들은 정해진 규범대로 이불을 만들고 덮었다. 

 3-2)농경사회 서민들의 생활

사실 문자를 해득한 국민이 1%에도 미치지 못했던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시행하는 과거시험을 치르고 관직에 임용되지 않으면 양반들도 생활이 힘들었다. 더구나 일반 서민들은 대부분이 지방 토호였던 대지주들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짓는 중세 유럽의 농노들의 생활과 다를 것이 없었다. 새벽부터 논밭에 나가 해가 질 때까지 힘들게 일을 하고 돌아와 대충 손발과 얼굴을 씻고 피로에 지쳐 잠자리에 골아떨어지기 마련이었다. 물론 샤워꼭지만 틀면 따뜻한 물과 찬물이 쉽게 나오는 오늘날의 도회지 젊은 세대들은 이해할 수 없는 삶이었다. 사실 이러한 풍경은 불과 50여 년 전인 1970년~1980년대까지도 한국의 농촌에서라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에 묻은 흙이나 오염된 물질들은 이부자리에 옮겨 묻을 수 있고, 이것을 뒤죽박죽 입 쪽으로 덮었다 발 쪽으로 덮었다 한다면 분명 위생상 좋지 않았을 것이다.

 3-3) 위생은 몰라도 마마귀신은 무섭다.

국민들의 민도가 낮고, 과학적 지식이 부족했던 그 당시에는 위생의 개념을 거의 모르던 시기였다. 복잡한  이부자리를 규정대로 만드는 일은 귀찮은 일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럴 시간에 논밭에 나가 일을 더해서 배고픈 자식들에게 더 먹이는 일이 급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이, 특히 어린 자녀들이 천연두에 걸려서 얼굴에 흉터가 남는다면 이건 끔찍한 일이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구하기 힘든 붉은 천을 구하여 규정대로 이불을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3-4) 전란에 대비한 엄청난 지혜

k-pop, k-food가 전 세계를 감동시키고 k-방산이 각광 받는 현대에 와서는 이해가 어려운 일이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나라가 가난하여 외적이 쳐들어와도 국가에 상비군이 부족했고 군인들을 모집하더라도 통일된 군복을 지급할 여유가 없었다. 다만 ' 몇 년 몇 월 며칠까지 각 가정에서 장정 한 명씩 흰색 바지에 검은색 저고리를 입고 머리에 붉은 천을 두르고 지정된 장소로 모여라' 하고 공고문을 써 붙이면 끝이었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유난히 손재주가 뛰어났고 지금도 그 전통은 이어진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이불을 펼쳐 솜이불 안감을 싸고 있는 천을 뜯어내어 바지와 저고리를 만들고 붉은 천은 머리에 두른다면 아마 2시간 정도면 옷 한 벌이 완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전국의 모든 가정에서 같은 이부자리를 만들어 사용했으니 공고문을 써 붙인 지 2시간이면 전국적으로 통일된 군복이 마련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미신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정말 엄청난 삶의 지혜이며 생활과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5.마무리

민도가 낮고 가난했던 옛날 백성들에게 위생관념이 어떻고, 전염병이 어떻고 하는 것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피부와 와닿지 않는 소리였다. 그러나 귀신은 무서웠던 것이다. 이렇게 백성들을 무서운 전염병으로부터 지켜 내고 일단 유사시에는 나라를 지키는 데도 대비를 했던 이러한 생활 속의 지혜와 과학을 미신으로 폄하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