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사형수가 된 아들에게 수의를 지어 보내며 명예로운 죽음을 수용하라고 한 어머니가 있었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안중근의 어머니'로만 기억되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호수까지 동포 각성운동을 전개하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가 된 독립운동가 조마리아의 삶을 조명한다.
1. 출생과 성장
1.1. 무인 가문의 둘째 딸
1862년 5월 6일(음력 4월 8일), 황해도 해주군 광석동에서 배천 조씨 진사 조선(趙煽)과 원주 원씨 사이에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배천(白川)이다. 본명은 조성녀(趙姓女)이며, 마리아는 천주교 세례명이다.
고조부 조완옥(趙完玉)은 무과 급제 후 훈련원 주부(主簿)로 봉직했으며, 증조부 조기원(趙箕源)은 명예직인 통덕랑(通德郞)의 품계를 받았다. 오빠 조규증(趙珪增)과 사촌 오빠 조철증(趙喆增)은 고종 대에 각각 행(行)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와 충훈부도사 겸 선략장군을 지냈다. 대대로 무관을 배출한 집안이었다.
1.2. 총명함으로 주목받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기가 그지없어 많은 집안에서 혼사를 논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교육을 받았고, 유교 사상과 함께 개화된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2. 안태훈과의 결혼과 가정
2.1. 양대 신동과의 혼인
같은 지역에 사는 동갑내기 안태훈(安泰勳, 1862~1905)과 혼인했다. 남편 안태훈은 박은식과 함께 황해도 내 양대 신동으로 불렸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여 안진사로 불렸으며, 개화파 박영효가 선발한 일본 유학생에 선발되기도 했다.
안태훈의 부친 안인수(安仁壽)는 해주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 1911년 한국을 방문한 베네딕토 수도원의 노베르트 베버 신부가 작성한 여행기에 따르면, 안인수는 8억석의 토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집안이었다.
2.2. 천주교 신자가 되다
평소 천주교에 관심을 두고 있던 남편 안태훈은 1896년 명동성당을 찾아가 천주교에 귀의했다. 어머니, 아내 조마리아, 누이동생들도 세례를 받게 했다. 1897년 10월 조마리아는 빌렘 신부(일부 기록에는 뮈텔 주교)의 영세를 받고 세례명 마리아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조마리아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일생을 살아가게 되었다.
2.3. 3남 1녀를 낳다
조마리아와 안태훈 사이에는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안성녀(安性女, 18811954), 안정근(安定根, 18861949), 안공근(安恭根, 18891939) 등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안중근은 태명이 안응칠(安應七)이었고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였다.
3. 애국 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
3.1. 남편의 독립운동 지지
대한제국이 러일전쟁 발발로 위기에 처하자 남편 안태훈과 아들 안중근 부자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조마리아는 이를 적극 지지하며 두 부자를 지원했다. "집안일은 생각지 않아도 된다. 최후까지 싸워라"고 말하며 아들을 보냈다.
3.2. 남편의 죽음
1905년 가을 안중근이 중국의 상황을 시찰하고자 상하이로 이동했고, 안태훈은 남은 가족과 함께 평양의 관문인 진남포로 이주하여 안중근의 귀국을 기다렸다. 그러나 얼마 후 안태훈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조마리아는 신천군 청계동에서 남편의 장례를 치른 뒤 진남포로 이주했다.
조마리아는 남편 안태훈의 생전에는 그의 충실한 내조자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그가 타계한 다음에는 구국 차원의 애국계몽사업에 뜻을 둔 장남 안중근을 따라 개화운동이 활발했던 삼화항(후일 진남포)으로 이주했다.
3.3. 민족교육과 국채보상운동
아들 안중근은 전 재산을 털어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천주교 계열의 학교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여 안중근 자신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조마리아는 아들의 교육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1907년 대구에서 서상돈의 주도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안중근이 자청하여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조마리아도 국채보상 의연금을 기부했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5월 29일자에는 "조마리아가 지불한 패물 명단"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삼화항은금폐지부인회의 회원으로서 집안의 은부치는 모두 의연했다. 기록물을 보면 은지환 2쌍, 은장도, 은귀이지 등 가격으로 총 20원 상당이다.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데 패물은 무엇에 쓰리오"라며 귀한 패물을 내놓았다.
4.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옥중 편지
4.1. 하얼빈 의거
1909년 10월 26일, 장남 안중근이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한국 침략의 원흉을 처단한 이 의거는 국내외 각지에서 반일운동을 벌이던 한인들에게 큰 찬양을 받았고, 나아가 서구 열강이 주목한 국제적인 사건이었다.
일제는 거사의 배후를 추적하기 위해 안중근의 고향집을 덮쳐 조마리아와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 안공근을 심문했다. 조마리아는 집요한 심문조사 과정에서 갖은 협박을 받았지만 끝까지 이겨냈다.
4.2. "항소하지 말라"는 편지
1910년 2월 14일 일본제국 재판부는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이 여순법원에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되었을 때, 안중근은 러시아와 영국인 변호사가 변호를 맡기를 자청하고 있으나 자신은 한국인 변호사의 변호를 받고 싶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두 아우는 이 소식을 어머니 조마리아에게 전보로 알렸다. 이에 따라 조마리아는 변호사를 선임하기 위해 평양의 천주교당에 머물렀는데,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빈번하게 방문하여 책임 추궁을 하며 괴롭혔다.
조마리아는 다른 사람을 통해 안중근에게 전언을 보냈다. "네가 조국을 위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오히려 영광이나 우리 모자가 현세에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그리고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고 말했다. 안중근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항소를 포기했다. "나는 처음부터 무죄요, 무죄인 나에게 감형을 운운하는 것은 치욕이다."
4.3. 수의를 지어 보내다
조마리아는 아들이 입을 수의를 손수 지어 보냈다. 행여나 아들이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하는 데 마음이 흔들릴까 염려하여 아들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눈물을 속으로 삼키며 수의를 마련하여 보내는 것으로 아들에게 독립운동가로서 나라를 위해 옳은 일을 했다는 지지의 뜻과 어머니의 큰 사랑을 전했다.
4.4. 시모시자(是母是子)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여순감옥에서 31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대의를 위한 기상과 아들을 향한 모정이 눈물겹게 교차하는 일화였다.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시모시자(是母是子)"라고 적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뜻이다.

5. 연해주 망명과 동포 각성운동
5.1. 일제의 탄압과 손자의 독살
안중근 순국 이후 조마리아는 아들이 죽음을 헛되이 만들지 않고자 결심했다. 1910년 5월 이후 조마리아는 안중근의 장녀이자 손녀딸 안현생을 명동성당 수녀원의 프랑스인 수녀에게 맡긴 뒤 자신도 안정근과 안공근 두 아들을 따라 연해주로 망명했다.
그러나 일제의 안중근 가족에 대한 끈질긴 탄압은 지속되었다. 급기야 1911년 여름 안중근의 맏아들 안분도(安文生, 일명 안문생)가 일제 밀정이 건네준 과자를 먹고 독살당했다. 불과 7세였다. 조마리아에게는 손자를 잃는 큰 슬픔이었다.
5.2.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호수까지
조마리아는 아들과 손자를 잃는 슬픔에도 불구하고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강해졌다. 식솔들이 일제의 위협을 피할 곳을 찾아, 블라디보스토크 북쪽으로 110km 떨어진 낯선 땅에 간신히 정착했다. 춥고 척박했지만, 오히려 그 거친 땅은 조마리아가 종횡무진 활약하는 독립운동의 무대가 되었다.
『독립신문』 1920년 1월 30일자에는 "안중근 의사의 모친은 해외에 온 이래 거의 쉬는 날이 없었다.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서쪽으로는 바이칼호수에 이르기까지 분주히 동포들을 각성시키는 사업에 종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미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거대한 대륙을 누비는 고행길에 맹수와 산적이 끊이질 않았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탄, 사납게 아가리를 벌리는 짐승들 앞에서도 조마리아는 대담했다.
5.3. 1917년 니콜리스크 이주
1917년 7월에는 니콜리스크로 이주하여 벼농사를 시도했지만,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치안이 어지러워졌다. 10년이 넘는 시간을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를 떠돌아야 했다.
6. 상하이 임시정부의 대모
6.1. 상하이 정착 (1919~1922년)
1919년 10월(일부 기록에는 1922년 6월) 조마리아는 상하이에 도착했다. 프랑스 조계의 남영길리에 정착했다. 차남 안정근과 함께 지내면서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상하이에서 조마리아는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라는 특별한 위상과 그의 헌신으로 독립운동가들과 교포들의 존경을 받았다.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함께 항일독립운동계를 중심으로 교포 사회의 대모 역할을 했다.
6.2. 임시정부경제후원회 창립
1926년 7월 19일 안창호의 주도로 결성된 상해재류동포정부경제후원회(일부 기록에는 임시정부경제후원회)에 참여하여 최승봉, 김보연, 하상린, 정광호, 김순애 등과 함께 정위원이 되었다. 재정난에 허덕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홍보하고,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6.3. 정신적 지주와 봉사 활동
조마리아는 상하이 동포들 가운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에도 힘썼다. 타지에서 상하이로 넘어온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식을 제공해주는 것은 물론 돌봄이 부족한 아이들을 돌봐주는 일,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로하고 돕는 일 등 자애로운 어머니의 표상이 될 만한 삶을 살았다.
상하이에서 조마리아와 함께 생활한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는 조마리아에 대해 "너그러우면서도 대의에 밝은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동포들은 '안중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조마리아를 잘 대접하려고 노력했지만, 조마리아는 늘 "나는 대접받으려고 여기 온 게 아닙니다. 대한 독립을 위해 싸우러 왔어요. 지금은 남의 나라에서 살지만 반드시 내 나라를 다시 찾읍시다"라고 호소했다.
6.4. 독립운동가들의 중재자
조마리아는 교민 사회에 다툼이 있을 때마다 나서서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독립운동가들 간 이견으로 다툼이 있을 때에도 특유의 온화한 리더십으로 타협의 다리를 놓는 일종의 '재판관' 역할을 했다. 이를 테면 조마리아는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후원자'였다.
6.5. '여중군자', '여걸'
조마리아는 생전에 '여중군자(女中君子)', '여걸(女傑)'이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신망이 높았다. 대동공보 편집장이자 독립운동가인 이강은 "불꽃 같은 안중근, 등불이 된 조마리아"라고 표현했다.
7. 1927년 순국
7.1. 위암 투병과 서거
1927년 7월 15일(일부 기록에는 7월 25일), 조마리아는 상하이에서 위암으로 66세(일부 기록에는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광복을 18년 앞둔 시점이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여인이라고 해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7.2. 상하이 사회장
장례는 상하이 프랑스조계 천주교당에서 상하이 교민장(일부 기록에는 사회장)으로 치렀다. 독립운동가들과 교포들이 모여 조마리아를 추모했다. 유해는 프랑스조계 만국공묘(萬國公墓)의 월남묘지에 안장되었다.
7.3. 묘소의 실종
그러나 이후 도시 개발로 묘지터가 개발되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조마리아의 무덤은 영영 사라졌다. 유해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조마리아는 곽낙원과 함께 유해가 실종된 독립운동가의 어머니가 되었다.
8. 자녀들의 독립운동
8.1. 3남 1녀 모두 독립운동가
조마리아와 안태훈의 자녀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장남 안중근(1879~1910)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31세에 순국했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이 추서되었다.
딸 안성녀(1881~1954)는 안중근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손수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었다. 그러나 연구자들의 무관심 속에 아직까지 독립유공 서훈을 받지 못했다.
차남 안정근(1886~1949)은 북만주 독립군을 통합시켜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확립했다. 대한적십자회의 운영을 맡았고, 해방 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한 채 상하이에서 객사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되었다.
삼남 안공근(1889~1939)은 백범 김구와 함께 한인애국단을 운영하며 윤봉길과 이봉창의 항일의거를 성사시켰다. 해방을 보지 못하고 충칭에서 암살당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되었다.
8.2. 3대에 걸친 독립운동
안태훈-조마리아-안중근 3형제-손자들로 이어지는 3대의 독립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보기 드문 사례다. 조마리아는 남편과 아들들을 독립운동에 내보내고, 손자까지 독살당하는 비극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9. 인물 평가
9.1. 안중근의 어머니이자 독립운동가
조마리아는 안중근의 어머니이자 독자적인 독립운동가였다. 아들에게 "집안일은 생각지 않아도 된다. 최후까지 싸워라"고 말하며 독립운동을 지지했고, 사형수가 된 아들에게 수의를 지어 보내며 "대의에 죽는 것이 효도다"라고 말했다. 아들 순국 후에도 연해주와 상하이에서 20년간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9.2.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
조마리아는 곽낙원과 함께 상하이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호수까지 동포 각성운동을 전개했고, 상하이에서는 임시정부경제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재정 지원과 봉사 활동에 헌신했다. 독립운동가들의 중재자이자 교포 사회의 대모였다.
9.3. 여성으로서 받은 차별과 평가 절하
9.3.1. '안중근의 어머니'로만 기억되다
조마리아는 오랫동안 '안중근의 어머니'로만 기억되었다. 그 자신의 독립운동 기여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국사 교과서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고, 일반 대중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2017년 7월에야 비로소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9.3.2.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의 의미와 한계
2008년 8월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이 추서되었다. 20년간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업적을 고려하면 애족장은 적절한 평가인지 의문이 제기된다. 곽낙원이 1992년 애국장(4등급)을 받은 것과 비교하면, 조마리아도 최소한 애국장은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장남 안중근은 대한민국장(1등급), 차남 안정근과 삼남 안공근은 독립장(3등급)을 받았다. 어머니 조마리아가 애족장(5등급)을 받은 것은 자녀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평가다. 이는 독립운동가의 어머니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낮았는지를 보여준다.
9.3.3. 역사 서술에서의 소외
조마리아는 안중근 관련 서적에서도 주변 인물로만 언급된다. 그 자신의 목소리나 생각을 담은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안중근에게 보낸 편지'로 알려진 내용도 실제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 아니라 구전(口說)일 뿐이라고 안중근 평화연구원은 밝혔다.
출생연도도 1862년설이 일반적이지만, 일부 기록에는 1862년경으로 표기되어 정확하지 않다. 사망일도 7월 15일과 7월 25일 설이 공존한다. 이는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체계적 기록이 부족했던 시대적 한계를 반영한다.
9.4. 조마리아의 어록과 정신
"집안일은 생각지 않아도 된다. 최후까지 싸워라" - 독립운동에 나서는 아들 안중근에게 한 말로, 독립운동을 적극 지지한 어머니의 마음을 보여준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 사형수가 된 아들에게 보낸 전언으로, 대의를 위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이다.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데 패물은 무엇에 쓰리오" -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며 패물을 내놓으면서 한 말로, 나라의 독립이 개인의 재산보다 중요함을 강조했다. "나는 대접받으려고 여기 온 게 아닙니다. 대한 독립을 위해 싸우러 왔어요. 지금은 남의 나라에서 살지만 반드시 내 나라를 다시 찾읍시다" - 상하이에서 동포들에게 한 말로, 독립운동의 목적을 명확히 했다.
"대의에 죽는 것이 효도다"라는 말은 개인의 생명보다 나라의 독립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희생이 '어머니의 당연한 역할'로만 간주되어 저평가된 것은 성차별의 문제를 제기한다. 50대 후반의 나이로 연해주로 망명하여 17년간 독립운동을 전개한 용기는 나이의 장벽을 뛰어넘은 모범이다.
10. 역사적 의의와 한계
10.1. 긍정적 평가
조마리아는 독립운동가의 어머니이자 독자적인 독립운동가였다. 아들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사형수가 된 아들에게 수의를 지어 보내며 항소를 포기하라고 한 용기는 후대에 큰 귀감이 되었다. 아들 순국 후에도 50대 후반의 나이로 연해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호수까지 동포 각성운동을 전개했다.
상하이에서는 임시정부경제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재정난에 허덕이는 임정을 지원했다. 독립운동가들과 교포들에게 정신적 지주이자 대모 역할을 했다. 타지에서 넘어온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봉사 활동에 헌신했다. 독립운동가들 간 다툼이 있을 때 중재자 역할을 하며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에 기여했다.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패물을 내놓고, 3남 1녀 모두를 독립운동에 헌신시킨 것은 한 가문 전체가 독립운동에 나선 사례다.
10.2. 비판적 검토
조마리아는 독립운동 단체를 직접 조직하거나 무장투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주로 아들을 지원하고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역할이었다. 이는 당시 여성, 특히 어머니 세대에게 허용된 역할의 한계를 반영하지만, 동시에 그의 기여가 저평가되는 요인이 되었다.
조마리아에 대한 기록이 충분하지 않다. 대부분의 기록이 아들 안중근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진다. 그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일기나 회고록이 없다. '안중근에게 보낸 편지'도 실제 기록이 아니라 구전이다. 출생연도, 사망일, 상하이 도착 시기 등 기본적인 사실조차 기록이 엇갈린다.
연해주에서의 활동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호수까지 동포 각성운동'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상하이에서의 활동도 임시정부경제후원회 위원과 봉사 활동으로만 전해질 뿐, 상세한 내용은 부족하다.
10.3. 현대적 의의
조마리아의 삶은 어머니가 자녀를 독립운동에 내보내는 희생을 보여준다. 아들을 독립운동에 보내고, 사형수가 된 아들에게 수의를 지어 보내며, 손자까지 독살당하는 비극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독립운동을 이어간 헌신은 독립운동가의 가족이 겪은 희생의 상징이다.
"대의에 죽는 것이 효도다"라는 말은 개인의 생명보다 나라의 독립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희생이 '어머니의 당연한 역할'로만 간주되어 저평가된 것은 성차별의 문제를 제기한다.
50대 후반의 나이로 연해주로 망명하여 20년간 독립운동을 전개한 용기는 나이의 장벽을 뛰어넘은 모범이다. 오늘날 고령화 시대에 중년과 노년의 사회 참여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11. 사랑과 가족의 서사
11.1. 부부의 동반자 관계
조마리아와 안태훈은 개화파 지식인 부부였다. 남편 안태훈이 천주교에 귀의하자 함께 신앙을 받아들였고, 남편이 독립운동에 뜻을 두자 적극 지지했다. 남편의 죽음 후에도 그의 뜻을 이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1.2. 3남 1녀를 독립운동가로
조마리아는 3남 1녀를 모두 독립운동가로 키웠다. 장남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순국했고, 딸 안성녀는 독립군 군복을 만들었으며, 차남 안정근과 삼남 안공근은 독립운동 단체를 이끌었다. 한 가문 전체가 독립운동에 헌신한 것이다.
11.3. 손자의 독살
1911년 안중근의 맏아들 안분도가 일제 밀정이 건네준 과자를 먹고 독살당했다. 불과 7세였다. 조마리아는 아들에 이어 손자까지 잃는 비극을 겪었다. 그러나 슬픔에 굴하지 않고 더욱 강인하게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11.4. 딸 안성녀에 대한 차별
아들 셋은 모두 건국훈장을 받았지만, 딸 안성녀는 독립군 군복을 만들며 독립운동에 헌신했음에도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했다. 이는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차별이 조마리아의 가족 내에서도 재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12. 재평가의 필요성
12.1. 건국훈장 등급 상향 논의
조마리아의 업적을 고려할 때 애족장(5등급)은 현저히 낮은 평가다. 20년간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3남 1녀를 모두 독립운동가로 키운 업적은 최소한 애국장(4등급) 이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곽낙원이 1992년 애국장(4등급)을 받은 것과 비교하면, 조마리아도 같은 등급을 받아야 한다. 아들 셋이 대한민국장(1등급)과 독립장(3등급)을 받은 것과 비교하면 어머니의 애족장(5등급)은 불균형하다.
12.2. 교육과 대중화
조마리아의 삶과 업적을 교과서에 더 자세히 수록하고, 대중에게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안중근을 다룰 때 조마리아를 함께 소개하여 독립운동가의 어머니가 겪은 고난과 희생을 알려야 한다. 2017년 7월에야 비로소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것은 늦은 감이 있다.
12.3. 딸 안성녀에 대한 서훈
조마리아의 딸 안성녀에 대한 서훈이 시급하다. 독립군 군복을 만들며 독립운동에 헌신했음에도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한 것은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차별이다. 조마리아의 재평가와 함께 딸 안성녀도 반드시 서훈되어야 한다.
12.4. 신사임당, 곽낙원과 함께 기억되어야 할 인물
조마리아는 한국 역사상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과 함께 '빛나는 어머니의 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 사람을 함께 기억하고 기념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조마리아의 유해가 실종되어 묘소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여, 국립묘지에 추모비를 세우는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12.5. 안중근 기념관에 조마리아 전시 확대
안중근의사기념관, 안중근의사숭모회 등 안중근 관련 시설과 단체에서 조마리아에 대한 전시와 교육을 확대해야 한다. 안중근의 의거를 가능하게 한 어머니의 교육과 지지, 순국 후 20년간의 독립운동을 함께 조명해야 안중근의 삶이 완성된다.
마무리
조마리아는 사형수가 된 아들에게 수의를 지어 보내고 "대의에 죽는 것이 효도다"라며 항소를 포기하게 한 어머니로 기억되지만, 그 자신도 20년간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호수까지 동포 각성운동을 전개하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로서 독립운동가들을 돌보며 교포 사회의 대모 역할을 했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이 추서되었지만, 이는 현저히 낮은 평가다. 곽낙원이 애국장(4등급)을 받은 것과 비교하면 불균형하다. 조마리아는 오랫동안 '안중근의 어머니'로만 기억되었고, 그 자신의 독립운동 기여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아들 순국 후에도 50대 후반의 나이로 20년간 독립운동을 이어간 헌신, 3남 1녀를 모두 독립운동가로 키운 희생, 손자의 독살에도 굴하지 않은 강인함은 독립운동가의 어머니가 겪은 비극과 영광을 상징한다. 신사임당, 곽낙원과 함께 '빛나는 어머니의 상'으로 평가받지만, 유해가 실종되어 묘소조차 없다. 대한민국은 조마리아에게 여전히 빚을 지고 있으며, 독립운동가의 어머니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재평가가 시급하다.
참고문헌
1.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2.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3. 안중근의사숭모회, 『안중근의사자료집』
4. 심옥주, 『여성독립운동가 평전』, 역사공간, 2015
5. 독립신문, 대동공보, 대한매일신보 각 연도 관련 기사
6. 정정화, 《장강일기(長江日記)》, 학민사, 1998
7.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여성독립운동사료집』, 2010
8. 윤병석, 『안중근 평전』, 동방미디어,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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