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내 몸은 묶어 갈 망정 내 마음은 못 묶어 가리라." 1919년 3월 3일, 개성에서 독립선언서 80장을 배포하며 "조선독립선언서"라고 당당히 외친 40세 전도부인. 16세에 결혼 3일 만에 남편을 잃은 청상과부가 홀로 개성으로 가서 교육을 받고, 전도사가 되어 외딴섬을 다니며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1919년 개성 3.1운동을 촉발시키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유관순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옥중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출옥 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또 투옥되었고, 광복 후 유린보육원을 세워 고아들을 돌본 어윤희의 삶을 통해,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민족과 여성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의 진면목을 살펴본다.
1. 출생과 성장
1.1. 1880년 6월 20일, 충주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나다
1880년 6월 20일(음력), 충청북도 충주에서 아버지 어현중(魚玄仲, 1853~1929)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종(咸從)이다.
아버지 어현중은 한성부 토호 갑부 집안의 서손(庶孫)이었다. 사촌 오빠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은 조선 후기 개화파 문신으로 홍영식·박정양 등과 함께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에 다녀온 인물이었다.
1.2. 어려서부터 한학 교육
어윤희는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무남독녀로 자란 어윤희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당시 여성에게 한학 교육을 시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아버지는 딸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교육에 힘썼다.
2. 결혼 3일 만에 과부가 되다
2.1. 1894년, 16세에 결혼
1894년(고종 31), 16세에 결혼했다. 남편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2.2. 결혼 3일 만에 남편 전사
결혼한 지 불과 3일 만에 남편이 동학군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16세 소녀는 청상과부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전국을 휩쓸었다.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와 동학농민군을 학살했다. 어윤희의 남편도 그렇게 죽었다.
2.3. 1896년, 아버지마저 사망
결혼 3일 만에 과부가 된 지 2년 후인 1896년, 아버지마저 사망했다. 18세의 어윤희는 천애 고아가 되었다.
남편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오빠도 없는 무남독녀. 어윤희는 홀로 남겨졌다.
3. 개성으로, 새로운 삶을 향해
3.1. 1896년, 개성으로 이주
1896년, 어윤희는 고향 충주를 떠나 개성으로 이주했다.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과부가 혼자 고향을 떠나 타지로 간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어윤희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3.2. 1910년, 개성 북부교회 교인이 되다
1910년, 어윤희는 개성 북부교회 교인이 되었다. 30세였다. 기독교는 어윤희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를 주었다.
북부교회 목사 강조원(姜助遠)은 후에 3.1운동 때 소심하여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지 못하는 인물이 되지만, 어윤희는 그가 못한 일을 해냈다.
3.3. 1912년, 미리흠여학교 기예과 입학
1912년, 32세의 어윤희는 개성 미리흠여학교(美理欽女學校) 기예과에 입학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늦은 나이에 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미리흠여학교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가 설립한 여성 교육기관이었다. 어윤희는 근대 교육을 받으며 새로운 세계를 접했다.
3.4. 졸업 후 전도사로 활동
미리흠여학교를 졸업한 후 어윤희는 전도부인(전도사)이 되었다. 외딴섬의 전도와 독립정신 계몽을 자원했다. 섬과 오지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동시에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단순히 종교 활동이 아니라 계몽운동이었다.
4. 1919년 3월 3일 개성 3.1운동
4.1. 1919년 2월, 독립선언서 개성 도착
1919년 2월, 서울에서 작성된 독립선언서가 개성에 도착했다. 북부교회 목사 강조원에게 수백 장이 전달되었다. 그러나 강조원은 소심하여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독립선언서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4.2. "내가 배포하겠다"
이 소식을 들은 어윤희가 나섰다. "내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겠다." 40세 과부 전도부인이 목숨을 건 결단을 내린 것이다.
4.3. 보따리장사로 가장하여 독립선언서 배포
어윤희는 보따리장사를 가장하고 대낮에 집집마다 독립선언서를 돌렸다. 호수돈여학교 유치원 교사 권애라(權愛羅)로부터 독립선언서 80장을 전달받아 오후 2시경 개성 시내 주요 인사들과 주민들에게 배포했다.
"조선독립선언서입니다!" 당당히 외치며 돌렸다. 이를 본 호수돈여학교 사감 신관빈(申觀彬), 장님 전도부인 심명철(沈明哲) 등이 합류했다.
4.4. 1919년 3월 3일, 개성 첫 만세운동
어윤희의 독립선언서 배포는 개성 지역 3.1운동을 촉발시켰다. 1919년 3월 3일, 신관빈과 함께 독립선언서 2,000부를 추가로 인쇄하여 호수돈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개성 지역의 첫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개성 시내에 만세 함성이 울려퍼졌다.
4.5. "너희가 내 몸은 묶어 갈 망정 내 마음은 못 묶어 가리라"
일본 경찰이 어윤희를 체포하러 왔다.
어윤희는 당당히 말했다. "너희가 내 몸은 묶어 갈 망정 내 마음은 못 묶어 가리라." 이 말은 어윤희의 불굴의 정신을 상징하는 명언이 되었다.

5. 서대문형무소와 옥중만세운동
5.1. 징역 1년 6개월 선고
어윤희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여성으로서 유일하게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배포 활동 및 개성지역 3.1운동을 촉발시킨 죄로 실형을 받았다.
5.2.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
어윤희는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에 수감되었다.
같은 감방에는 개성 만세운동을 함께 이끈 권애라, 신관빈, 심영식(沈英式)을 비롯하여 수원에서 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향화(金香花), 파주의 만세운동을 이끈 임명애(林明愛), 그리고 유관순이 함께 수감되어 있었다.
5.3. 191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만세
191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여옥사 8호의 수감자들이 만세를 외쳤다. 옥중에서도 독립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5.4. 1920년 3월 1일, 옥중만세운동 주도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 어윤희는 유관순, 이신애 등과 함께 옥중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벽을 두드리는 비밀 통신 방법인 '통방(通房)'으로 17개 여자 감방의 세를 모았다. 오후 2시, 유관순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서대문형무소 전체에 만세 소리가 울려퍼졌다. 어윤희는 유관순과 함께 옥중만세운동의 핵심 주도자였다.
5.5. 유관순의 순국을 지켜보다
옥중만세운동 후 일제는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유관순은 방광이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다. 어윤희도 함께 고문을 당했다.
1920년 9월 28일, 유관순이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어윤희는 유관순의 마지막을 지켜봤다.
훗날 어윤희는 『옥중에서의 유관순』이라는 회고록을 남겼다. 유관순이 옥중에서 배고픔, 외로움, 동생들에 대한 걱정으로 슬퍼했으며, 고문과 상처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6. 1920년 4월 출옥, 계속된 독립운동
6.1. 1920년 4월 출옥
1920년 4월, 어윤희는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했다. 3.1운동의 투쟁 경력을 인정받아 개성 지역 민족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6.2. 독립의군부 국내 파견단원 지원
출옥 후에도 어윤희는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독립의군부 밀사들에게 여비와 은신처를 제공했다. 육혈포(六穴砲, 권총) 탄환을 비밀리에 전달하는 등 위험한 활동을 이어갔다.
6.3. 개성경찰서 폭파 계획 가담
어윤희는 개성경찰서 폭파 계획에 가담했다가 다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두 번째 옥고였다. 석방된 후에도 어윤희의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7. 1920년대 여성운동과 민족운동
7.1. 개성여자교육회 지도자
1920년 출옥 후 어윤희는 개성여자교육회의 지도급 인사로서 개성 지역 여성 교육과 계몽 및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한 활동에 앞장섰다. 여성도 교육받아야 하고, 여성도 사회 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이었다.
7.2. 1927년, 신간회 개성지회 간사
1927년, 비타협적 민족협동전선 단체인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었다. 어윤희는 신간회 개성지회 창립부터 중심인물로 지회 창립을 도왔으며, 개성지회 해소 시까지 줄곧 간사로 활약했다.
신간회운동의 목표인 비타협적 협동전선운동과 조선인 본위의 정책 등을 위한 활동에 헌신하였다.
7.3. 근우회 개성지회 숨은 주역
어윤희는 자신이 이끈 개성여자교육회를 모태로 근우회(槿友會) 개성지회를 출범시켰던 숨은 주역이었다.
근우회는 1927년 5월 27일 창립된 좌우합작 여성운동 단체로, 신간회의 자매단체였다. 근우회가 지향하는 여성 지위 향상과 민족 독립투쟁이라는 목표에 공감하여 종교적인 신념에 구속됨이 없이 민족독립운동 전선에 동참했다.
여성 계몽과 교육을 통한 여성 해방과 민족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던 선각적인 여성이었다.
8. 광복 후 사회사업
8.1. 1945년 광복, 유린보육원 설립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했다. 65세의 어윤희는 개성에 유린보육원(有隣保育院)을 설립하여 전쟁고아들을 돌보았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삶을 이어 이제는 고아들을 위해 헌신했다.
8.2. 6.25전쟁, 부산으로 피난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다. 어윤희는 개성을 떠나 부산으로 피난했다. 유린보육원 고아들도 함께 데리고 갔다.
8.3. 1952~1962년, 서강교회 장로
1952년부터 10년간 부산 서강교회 장로로 시무하면서 사회사업에 전념하였다.
8.4. 서강유린보육원 설립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돌아온 어윤희는 서울 마포에 서강유린보육원을 설립하여 운영했다. 고아들을 돌보는 일을 평생 계속했다.
8.5. 81세로 별세
1961년 11월 18일, 어윤희는 서울에서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6세에 과부가 된 후 65년간 혼자 살며 민족과 여성, 고아를 위해 헌신한 삶이었다. 광복 후 16년을 더 살면서 사회사업에 헌신했다.
9. 인물 평가
9.1. 개성 3.1운동을 촉발시킨 여성 독립운동가
어윤희는 1919년 3월 3일 개성 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을 촉발시켰다. 보따리장사로 가장하고 독립선언서 80장을 배포하며 "조선독립선언서"라고 당당히 외쳤다.
여성으로서 유일하게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배포 활동 및 개성지역 3.1운동을 촉발시킨 죄로 1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9.2. 유관순과 함께한 옥중만세운동 주도자
1920년 3월 1일, 어윤희는 유관순, 이신애 등과 함께 옥중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7개 여자 감방의 세를 모아 만세투쟁을 전개했다.
유관순의 순국을 지켜본 어윤희는 훗날 『옥중에서의 유관순』이라는 회고록을 남겨 유관순의 마지막을 증언했다.
9.3. 1920년대 여성운동·민족운동 지도자
1920년 출옥 후 어윤희는 개성여자교육회를 이끌고, 신간회 개성지회 간사로 활약하고, 근우회 개성지회를 출범시킨 숨은 주역이었다. 여성 교육과 계몽, 여성 인권 향상, 민족 독립투쟁을 위해 헌신한 선각적 여성이었다.
9.4. 평생을 고아를 위해 헌신
광복 후 어윤희는 유린보육원, 서강유린보육원을 설립하여 전쟁고아들을 돌보았다. 81세까지 사회사업에 헌신했다.
독립운동만큼이나 고아들을 위한 헌신도 위대했다.
9.5. 불우한 환경을 스스로 극복한 선각자
16세에 결혼 3일 만에 과부가 되고, 18세에 아버지마저 잃은 어윤희는 스스로의 힘으로 불우한 환경을 극복했다.
고향을 떠나 개성으로 가서 32세에 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전도사가 되어 민족을 계몽하고, 40세에 독립운동에 나서고, 65세에 고아원을 세우고, 81세까지 사회사업에 헌신했다.
10. 여성으로서 받은 차별과 평가 절하
10.1. 1995년에야 건국훈장 애족장
1995년, 어윤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이 추서되었다. 사후 34년 만이었다. 광복 후 50년이 지나서였다.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장(1등급), 대통령장(2등급), 독립장(3등급), 애국장(4등급), 애족장(5등급)의 5개 등급으로 구성되어 있다. 애족장은 가장 낮은 등급이다.
개성 3.1운동 촉발, 독립선언서 배포, 옥중만세운동 주도, 1년 6개월 옥고, 두 번째 투옥, 1920년대 여성운동·민족운동 지도, 광복 후 사회사업 등의 업적을 고려할 때 애족장은 현저히 낮은 평가다.
10.2. 유관순의 그림자에 가려지다
어윤희는 유관순과 함께 옥중만세운동을 주도했지만, 유관순이 순국하고 어윤희는 생존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다.
유관순은 국민적 영웅이 되었지만, 어윤희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유관순의 증언자로만 기억될 뿐, 어윤희 자신의 독립운동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10.3. 역사 서술에서의 소외
어윤희는 오랫동안 국사 교과서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일반 대중에게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2019년 영화 <1919 유관순>에서 양윤희가 어윤희 역을 맡으면서 조금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대중적 인지도는 낮다.
10.4. 생전의 표창들
어윤희는 생전에 다음과 같은 표창을 받았다:
1953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기장
1959년 인권옹호 공로표창
1961년 3.1운동 선도자 표창
그러나 건국훈장은 사후 34년이 지나서야 추서되었다.
11. 역사적 의의와 한계
11.1. 긍정적 평가
어윤희는 16세에 결혼 3일 만에 과부가 되고 18세에 아버지마저 잃은 불우한 환경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했다. 32세에 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전도사가 되어 민족을 계몽하고, 40세에 개성 3.1운동을 촉발시켰다.
독립선언서 배포, 옥중만세운동 주도, 두 번의 투옥, 1920년대 여성운동·민족운동 지도, 광복 후 고아원 설립 등 평생을 민족과 여성, 고아를 위해 헌신했다. "너희가 내 몸은 묶어 갈 망정 내 마음은 못 묶어 가리라"는 말은 불굴의 정신을 상징한다.
11.2. 비판적 검토
어윤희의 독립운동은 주로 개성 지역에 집중되었다. 전국적 조직이나 운동을 주도하지는 못했다. 이는 시대적 한계이기도 하다.
1920년대 신간회·근우회 활동도 개성지회 중심이었다. 중앙 조직에서의 역할은 명확하지 않다.
광복 후 사회사업에 헌신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기록이 부족하다.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체계적 기록이 부족했던 시대적 한계를 반영한다.
11.3. 현대적 의의
어윤희의 삶은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역사의 주체로 나선 여성의 사례다. 16세 청상과부가 홀로 고향을 떠나 교육을 받고, 독립운동에 나서고, 사회사업에 헌신한 것은 여성의 주체적 삶을 보여준다.
오늘날 여성의 사회 참여, 평생교육, 사회공헌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12. 사랑과 가족의 서사
12.1. 결혼 3일 만에 남편을 잃다
1894년, 16세에 결혼한 지 불과 3일 만에 남편이 동학군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신혼의 꿈도 꾸기 전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12.2. 18세에 아버지마저 사망
1896년, 18세에 아버지마저 사망했다. 남편도 없고 아버지도 없는 무남독녀. 천애 고아가 되었다.
12.3. 평생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다
어윤희는 16세에 과부가 된 후 81세까지 65년간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독립운동과 사회사업에 헌신하는 삶을 선택했다.
12.4. 고아들이 가족이 되다
가족이 없는 어윤희에게 유린보육원, 서강유린보육원의 고아들이 가족이 되었다. 평생을 고아들을 돌보며 살았다.
13. 재평가의 필요성
13.1. 건국훈장 등급 상향 논의
어윤희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을 추서받았다. 개성 3.1운동 촉발, 독립선언서 배포, 옥중만세운동 주도, 1년 6개월 옥고, 두 번째 투옥, 1920년대 여성운동·민족운동 지도 등을 고려할 때 최소한 애국장(4등급) 이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유관순과 함께 옥중만세운동을 주도했음에도 유관순은 2019년 대한민국장(1등급)으로 추서되었고, 어윤희는 여전히 애족장에 머물러 있다.
13.2. 기념사업
개성은 북한 지역이라 기념관을 세우기 어렵지만, 남한에 어윤희 기념관이나 기념비를 건립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여성독립운동기념관에 어윤희 전시관을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는 유관순 전시실이 있다. 같은 공간에 어윤희, 이신애 등 옥중만세운동에 참여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전시 공간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
13.3. 교육과 대중화
어윤희의 삶과 업적을 교과서에 더 자세히 수록하고, 대중에게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2019년 영화 <1919 유관순>에서 어윤희가 등장했지만, 여전히 대중적 인지도는 낮다.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하여 대중에게 알리는 것도 효과적이다. 16세 청상과부가 홀로 교육받고, 40세에 독립운동에 나서고, 81세까지 사회사업에 헌신한 드라마틱한 서사는 영상화하기에 적합하다.
13.4. 『옥중에서의 유관순』 재조명
어윤희가 남긴 『옥중에서의 유관순』은 유관순의 옥중 생활을 증언하는 귀중한 자료다. 이 회고록을 더욱 널리 알리고, 어윤희 자신의 독립운동도 함께 조명해야 한다.
마무리
어윤희는 1880년 충주에서 태어나 16세에 결혼 3일 만에 남편을 잃고 18세에 아버지마저 사망하여 천애 고아가 되었다. 개성으로 이주하여 32세에 미리흠여학교에 입학하고 전도사가 되었다. 1919년 3월 3일 보따리장사로 가장하여 독립선언서 80장을 배포하며 개성 3.1운동을 촉발시켰고, 1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0년 3월 1일 유관순, 이신애 등과 함께 옥중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유관순의 순국을 지켜본 후 훗날 『옥중에서의 유관순』이라는 회고록을 남겼다. 출옥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또 투옥되었고, 1920년대에는 개성여자교육회, 신간회 개성지회 간사, 근우회 개성지회 조직 등 여성운동·민족운동을 이끌었다. 광복 후 유린보육원을 설립하여 고아들을 돌보며 1961년 11월 18일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을 추서받았지만 유관순의 그림자에 가려 일반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너희가 내 몸은 묶어 갈 망정 내 마음은 못 묶어 가리라"고 외친 어윤희의 불굴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대한민국은 평생을 민족과 여성, 고아를 위해 헌신한 어윤희를 더욱 기억해야 한다.
참고문헌
1.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2.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3. 어윤희, 『옥중에서의 유관순』
4. 박환, 『여성 독립운동가 평전』, 선인, 2018
5.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대문형무소 여성 독립운동가』
6. 이배용, 『한국근대여성운동사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9
7. 개성시, 『개성의 3.1운동』
8. 김경일,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푸른역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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