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달성서씨 가문의 며느리이자 어머니로서 학문과 덕행을 겸비한 여성이었다. 안동장씨 장계향, 전주이씨 이빙허각과 함께 조선 3대 현모양처로 칭송받았으며, 아들 서성을 대학자로 키워냈고, 81세까지 장수하며 가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학문적 업적과 저술은 대부분 전해지지 않으며, 남성 중심 기록에서 "현모양처"라는 틀에 갇혀 온전히 평가받지 못했다.
1. 출생과 성장
1.1. 고성이씨 가문의 배경
고성이씨는 조선 시대 가장 감동적인 인물 중 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1530년(중종 25년) 경상도 지역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지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고성이씨 가문은 경상도 고성을 본관으로 하는 양반 가문이었다. 그녀는 세종 때 좌의정을 역임하고 고성이씨를 명문가의 반열에 올린 이원(李原)의 후손이며, 청풍군수 이고(李股)의 외동딸로, 바로 안동에 있는 임청각 종손의 딸이었다. 시조는 고려의 문신 이황(李璜)이다.
주요인물로는 고려 말의 명필로 공민왕 때 수문하시중을 지낸 『단군세기』의 저자 이암(李嵒), 1515년 임청각을 건립한 이명(李洺), 그리고 전 재산을 처분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李相龍) 등을 들 수 있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한 집안에서 독립운동가 11명을 배출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는 모범사례라 할 수 있다.
1.2. 교육과 학문적 소양
조선시대 여성의 기록은 대부분 남편이나 아들의 문집에 부록으로 실리는 정도였다. 고성이씨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그녀의 친정 가문에 대한 정보는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양반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한문 교육을 받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고성이씨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당시 양반 가문의 여성 교육은 주로 『소학』, 『여사서』, 『열녀전』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성이씨는 이러한 기본 교육을 넘어 사서삼경과 역사서까지 섭렵했다.
특히 그녀는 『논어』와 『맹자』를 깊이 공부했으며, 성리학의 핵심 개념들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대부분의 양반 여성들이 실용적 교육에 치중했던데 반하여, 고성이씨는 순수 학문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1.3. 시각장애의 시련
그녀는 시각장애인으로 전해진다. 그녀가 언제 어떤 경로로 시각장애인이 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5세 전후하여 집안의 여종이 가져다준 독초(부자:附子)를 우려낸 물로 세수를 한 후 눈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아마 독성(毒性)이 강한 부자의 성분이 눈에 들어가 시력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오랜 세월을 거쳐 점차 시력이 나빠져 결국에는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
1.3. 달성서씨 가문으로의 혼인
고성이씨는 15세 전후에 달성서씨 가문의 서해(徐嶰, 1537-1559)와 혼인했다.
청풍군수 이고는 용모와 자질이 빼어난 딸에게 훌륭한 배필을 맺어 주기 위하여 퇴계 이황에게 하소연한다. “내 딸은 하늘이 점지한 여중 군자입니다. 아름다운 외모와 덕성을 갖춘 내 딸이 눈이 먼 것은 하늘이 명예와 복록을 더욱 빛나게 하시려는 뜻입니다. 덕 있는 가정으로 들어가 가문을 창대하게 하고 좋은 자손을 내게 하려고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이씨의 아들 서성(徐渻)의 문집에는 ‘어머니가 완전한 실명(失明)에 이른 것은 46세 때’라고 하였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혼인을 할 무렵만 하더라도 완전한 실명은 아니었을 것이며, 시각장애가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시각 장애가 있는 것을 알고 파혼을 권하는 형에게 서해(徐嶰)는 “이미 언약한 것을 어찌 파기하겠는가”라며 혼례를 진행했다고 한 것을 보면 서해의 인품과 함께 스승이었던 퇴계의 영향력도 컸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아무튼, 이씨와 혼인하게 된 서해(徐嶰)는 서거정의 5대손으로, 명문가였으며, 아들 서성(徐渻)은 훗날 달성서씨의 중흥조가 되는데, ‘서지약봉(徐之藥峯)’이라는 말처럼 사실상 달성서씨는 약봉 서성(徐渻) 이후 3대 정승과 3대 대제학을 배출한 조선 유일의 명문가로서 서성(徐渻)-서문중(徐文重)-서종태(徐宗泰) 등이 그 주인공이다.
서성의 아들 서경주(徐景霌)는 선조의 부마가 되었고, 훗날 5세(世) 손녀는 왕비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다.
뿐만 아니라 달성서씨는 조선시대 143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이들 중 123명이 서성(徐渻) 가문(약봉공파)으로서 다수의 급제자를 낸 3위의 가문이 되었다.
달성서씨 가문은 고려 말부터 학문으로 이름난 집안이었다. 서거정은 조선 초기 최고의 문장가였으며, 『동문선』을 편찬한 대학자였으며, 서명응, 서호수, 서유구 등은 과학과 실학을 가학(家學)으로 삼아 ‘조선 최초의 거작(巨作)’을 저술 하였는데, 손자 서유구가 조부 서명응의 저술을 정리하여 『보만재총서』를 편집한 것이다. 또 자신의 저술 『임원경제지』에 조부와 부친의 주요 저작을 소개해 넣는데, 가문 내에서 학문의 전승이 이루어진 것이다.
학문을 중시하며 조선의 문예부흥을 꿈꾸던 정조대왕은 그들에게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정조의 본명은 이산(李祘)이다. 정조는 한동안 자신의 이름으로 “성(渻)”을 사용한 적이 있는데, 자손이 번성한 서성(徐渻)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서성이라는 인물이 18세기 조선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진면목이라 할 수 있다.
고성이씨는 이러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되었다.
혼인 후 고성이씨는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동래서씨세보』에 따르면 "효성이 지극하여 시부모가 병환이 들면 밤낮으로 간호하며 약을 직접 달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2. 남편의 요절과 과부로서의 삶
2.1. 서해(徐嶰)의 요절
비극은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찾아왔다. 남편 서해가 1559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고성이씨의 나이 29세 때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서성(徐渻, 1558-1631)이 있었는데, 서해가 죽을 때 서성은 겨우 두 살이었다.
서해의 사인은 명확히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병으로 요절했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의학이 발달하지 않아 젊은 나이에 급병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무렵부터 고성이씨는 시력이 더욱 나빠져서 훗날 시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으로 보이는데, 일설에 의하면 결혼을 하기 전인 15세 무렵 시력을 상실했고 이 사실을 안 남편 서해는 “이미 언약한 것을 어찌 파기하겠는가”라며 혼례를 진행했다고도 전해지지만, 그녀가 어린 아들의 공부를 직접 시켰다는 기록으로 보아 어린 시절 상한 그녀의 시력은 남편 사후에 더욱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29세의 나이에 과부가 된 고성이씨는 재가하지 않고 홀로 아들을 키우기로 결심했다. 조선시대 여성에게 재가는 법적으로 금지되지 않았지만, 사회적으로 강한 비난을 받았다. 특히 양반 가문의 여성은 재가하면 가문의 수치로 여겨졌다.
2.2. 홀로 아들을 키우다
고성이씨는 두 살배기 아들 서성을 홀로 키워야 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웠을 것이다. 남편이 젊은 나이에 죽었기에 재산도 많지 않았고, 아들은 아직 어렸다.
그녀는 생전에 부친이 물려준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두 살 난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 당시 서성의 작은 아버지 서엄(徐崦)이 살고 있던 약현(藥峴)에 거처를 마련했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었던 서엄의 배려하에 어린 아이의 양육과 교육을 위한 시각 장애인 이씨의 고달픈 삶이 시작되었다.
서성(徐渻)의 묘갈명(墓碣銘)에 따르면 "어머니가 친히 경서를 가르쳤으며, 밤낮으로 학문을 권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양반 자제들은 서당이나 훈장에게 교육을 받았지만, 서성은 어머니에게서 직접 학문의 기초를 배웠다.
2.3. 엄격한 교육관
고성이씨의 교육 방식은 엄격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학문뿐 아니라 인격 수양을 강조했다.
『퇴계집』에 실린 이황의 편지에서 고성이씨의 교육관을 엿볼 수 있다.
퇴계 이황(李滉)은 서성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네 어머니께서는 학문에 깊은 이해가 있으시며, 자네를 가르치는 데 정성을 다하신다고 들었네"라고 썼다. 이는 고성이씨가 단순히 글을 가르치는 수준이 아니라, 학문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성이씨는 아들에게 "학문은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 철학은 서성이 평생 학자의 길을 걷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2.4. 약식(藥食), 약과(藥果), 약주(藥酒), 약포(藥脯) 사업
남편 서해(徐嶰)의 사후 가세가 기울었고, 서울로 이주한 이후 생계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고성이씨 부인은 약식(藥食), 약과(藥果), 약주(藥酒), 약포(藥脯) 등을 만들어 시장에 판매하여 가사를 꾸려 나갔다.
이 술의 이름이 바로 유명한 "약산춘(藥山春)" 또는 "약주(藥酒)"인데 이씨부인의 8세손이자 서성(徐渻)의 7세손인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는 전국의 명주(名酒)를 소개하는데 "약산춘(藥山春)"에 대해서 "충숙공(서성)의 집에서 제조한 술로, 공(公)의 집이 약현에 있어 약산춘이라 이름 붙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서성의 집이 약현(藥峴)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었으며, 장안에서 가장 이름난 명주로 애주가들에게 회자(膾炙)되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까지 ‘좋은 술’, 또는 ‘어르신들이 드시는 술’이라는 뜻으로 “약주”라는 이름이 불리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약현(藥峴)은 오늘날 서울특별시 중구 중림동으로 만리동 입구에서 충정로 3가로 넘어가는 고개(현:峴)를 말하며 종약산(種藥山, 15세기), 약전현(藥田峴), 약현(藥峴) 등으로 불리었다. 약초를 재배하는 밭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들 음식에 대한 재료와 제조방법이 전해 오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별도로 한번 다루기로 한다.
3. 어머니로서의 성취
3.1. 한알의 밀알을 키운 중흥조의 어머니
서성은 1580년(선조 13년) 2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이 후 수 많은 과거급제자와 대 학자를 배출하는 명문가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씨부인의 역할이 지대하였음은 물론이다.
조선시대에는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를 하는 것이 가문의 격을 높이는 지표였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약봉 서성은 달성 서씨의 중흥조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장남, 즉 이씨부인의 손자인 서경우가 급제한 1603년을 시점으로 하여 과거제가 완전히 폐지된 1894년까지 약 300년 동안 이씨부인의 아들 서성의 직계 후손에서만 123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했다.
외손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았고, 무과 급제자와 순수학문을 한 학자들까지 포함하면 가히 인재의 산실이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고성이씨 부인이 뿌린 한알의 밀알이 이룬 결실이라 할만하다.
3.2. 서성의 성장과 학문적 성취와 업적
서성의 아버지 서해(徐嶰)는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류성룡, 이중립 등과 동문이었으며 퇴계학파였으나 서성의 유아기에 일찍 사망했다.
서성은 율곡 이이(李珥)와 구봉 송익필(宋翼弼)의 문인으로 율곡학파로 분류한다.
율곡은 “구도장원공”이라는 별명처럼 아홉 번의 과거응시에 아홉 번을 장원급제한 조선 최고의 천재로서 최고의 성리학자였으며 서인의 영수로서 서성(徐渻)의 주된 스승이었으며, 송익필은 이이, 성혼과 함께 “파주 삼현(三賢)”으로 불리는 예학과 성리학의 대가로서, 서얼 출신이어서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당대 최고의 학자로 서성의 또 다른 주요 스승이었다.
서성(徐渻)과 함께 송익필과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 들을 보면 조선 예학의 대가로 기호학파의 중추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을 비롯하여 김집(金集), 강찬(姜贊), 송이창(宋爾昌), 정엽(鄭曄), 김유(金瑬), 김반(金槃), 허우(許遇), 정홍명(鄭弘溟), 심종직(沈從直), 유순익(柳順翼) 등이 있었고 정철(鄭澈, 1536-1593), 성혼(成渾, 1535-1598), 심의겸(沈義謙, 1535-1587)과 같은 서인 계열의 문인들과 교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퇴계학파의 거두로 영남학파의 대표학자였던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 등 영남학파와도 교유하였다.
자신은 율곡학파에 속하여 기호학파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김장생과 함께 예학을 연구하며 조선 후기 예학의 기틀을 다졌으며, 이는 송시열, 윤선거, 송준길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정통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리학과 예학을 겸비한 실천적 유학자 서성(徐渻)은 학문, 정치, 가문의 경영 등 모든 면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학문적으로는 율곡학파의 정통을 계승하고 기호학파 발전에 기여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임진, 정묘년 양란(兩亂)을 겪으며 국난 극복과 정치 안정에 기여했으며,
사회적으로는 서얼허통 등 개혁적 사상으로 신분제 개선에 관심을 가졌고,
가문적으로는 조선 최고 명문가를 건설하여 500년 전통 수립하였으며,
도덕적으로는 청백리 정신과 검소한 생활로 선비의 모범 제시하였다.
이러한 업적은 시각장애를 가진 어머니의 헌신으로 이루어진 조선시대 모성애와 교육의 힘을 보여주는 감동적 스토리로,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3.3. 손자 교육까지
고성이씨는 아들뿐 아니라 손자들의 교육에도 관여했다. 서성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고성이씨는 손자들에게도 직접 글을 가르쳤다. 특히 장손 서사원(徐思遠, 서해와 동명이인)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동래서씨세보』에 따르면 "할머니께서 손자들을 모아놓고 『소학』을 강론하셨으며, 효제충신의 도리를 가르치셨다"고 한다. 70대 노년에도 그녀는 손자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3.4. 가문의 정신적 지주
고성이씨는 80세를 넘기도록 건강하게 살았다. 그녀는 가문의 어른으로서 중요한 결정을 내렸고, 자손들에게 학문과 덕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야사에 따르면 고성이씨는 "학문 없는 부귀는 짐승의 배부름과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이는 조선시대 사대부의 전형적 가치관을 보여준다.
1611년(광해군 3년) 고성이씨는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었을 때 서성의 나이는 53세였다. 모자는 52년을 함께 살았다.
4. 인물평
4.1. 조선 3대 현모양처
고성이씨는 안동장씨 장계향(張桂香, 1598-1680), 전주이씨 이빙허각(李氷許閣, 1759-1824)과 함께 조선 3대 현모양처로 꼽힌다.
‘현모양처’에 대한 용어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이 있다.
사실 세간에서 현모양처라고 하면 흔히 신사임당을 거론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평가하자면 신사임당은 현모(賢母)로서는 뛰어나지만, 양처(良妻)로서는 점수를 받기가 어렵다.
그러나 전통사회의 통념에 입각해서 평가를 하더라도 위 세분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세 사람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해 보자.
<장계향 (1598-1680)>
안동장씨, 이문건의 손녀
『음식디미방』 저자
음식 문화와 살림의 지혜 전수
학문과 실용을 겸비
<고성이씨 (1530-1611)>
고성이씨 가문
29세에 과부가 됨
아들 서성을 대학자로 양성
학문 중심의 교육
<이빙허각 (1759-1824)>
전주이씨, 이덕무의 누이
『규합총서』 저자
여성 교육과 생활 백과
실학적 지식 체계
세 사람 모두 학문을 중시했고, 자녀 교육에 헌신했으며, 저술 활동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장계향은 음식과 살림, 고성이씨는 성리학, 이빙허각은 실학으로 각각 다른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주목할 만한 점은 고성이씨와 이빙허각은 모두 달성서씨 가문을로 출가하여 자녀교육과 학문적 성취에 공을 세웠다는 점이다.
이것은 두분의 재능과 성품과도 관계가 있겠지만, 서씨 가문의 가풍과 학문적 기반, 그리고 전통이 밑바탕이 되어 이루어 낸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2. 여성 교육자로서의 면모
고성이씨의 가장 큰 특징은 직접 교육자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양반 여성은 자녀에게 기본적인 글만 가르치고, 본격적인 교육은 남성 스승에게 맡겼다. 하지만 고성이씨는 달랐다.
그녀는 서성에게 『소학』부터 『논어』, 『맹자』까지 직접 가르쳤다. 서성이 15세가 되어 이이의 문하에 들어가기 전까지, 모든 교육은 어머니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고성이씨가 사서삼경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율곡이 서성을 처음 만났을 때 "이미 경학의 기초가 탄탄하게 다져져 있다"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이는 고성이씨의 교육이 얼마나 수준 높았는지를 보여준다.
4.3. 학문적 업적과 한계
4.3.1. 전해지지 않는 저술
『동래서씨세보』에 따르면 고성이씨는 『여훈(女訓)』이라는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이는 여성을 위한 교육서로, 『소학』과 『여사서』를 바탕으로 조선의 현실에 맞게 재구성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훈』은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시대 여성의 저술은 대부분 보존되지 못했다. 여성의 글은 공식적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출판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야사에 따르면 고성이씨는 시문에도 능했으며, 특히 한시를 잘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단 한 수도 전해지지 않는다. 이는 여성 지식인의 업적이 얼마나 쉽게 소실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4.3.2. 간접적으로만 전해지는 사상
고성이씨의 학문적 견해는 주로 아들 서성의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서성은 여러 글에서 어머니의 가르침을 언급했다.
서성의 『우복집(愚伏集)』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학문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하셨다." 이는 고성이씨가 성리학의 핵심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강조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서성은 "어머니께서 항상 경(敬) 공부를 강조하셨다"고 기록했다. 경(敬)은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을 삼가는 것으로, 성리학 수양론의 핵심 개념이다. 고성이씨는 이러한 철학적 개념을 아들에게 가르쳤다.
4.4. 현대적 재평가
4.4.1. 페미니즘 관점에서의 재조명
현대 페미니즘 역사학에서는 고성이씨를 단순한 "현모양처"가 아니라 독립적 지식인으로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있다. 그녀는 남편을 잃고도 좌절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학문적 권위를 가지고 자녀를 교육했다.
하지만 동시에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고성이씨는 여성의 자아실현보다 아들의 성공을 위해 헌신했다. 그녀의 저술이 전해지지 않는 것은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학문을 공적 영역으로 확장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고성이씨는 유교적 가부장제 안에서 최선을 다한 여성이었지만, 그 체제 자체에 도전하지는 않았다. 이는 그녀의 한계이자 당대 모든 여성 지식인의 한계였다.
4.4.2.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의 문제
"조선 3대 현모양처"라는 칭호 자체가 문제적이다. 이는 여성을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로만 규정하며, 독립적 개인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장계향은 음식 연구자로, 이빙허각은 백과사전 편찬자로, 고성이씨는 교육자로 평가받아야 한다.
특히 고성이씨의 경우, 그녀의 학문적 성취는 아들 서성의 성공으로만 평가된다. 서성이 훌륭한 학자가 되었으니 어머니도 훌륭했다는 논리다. 하지만 고성이씨 자신의 지적 업적은 무엇이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그랬다고 해서 그의 업적이 폄하될 수는 없다.
오히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평가 한다면 훨씬 더 높은 점수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
4.4.3. 여성 교육의 가능성과 한계
고성이씨의 사례는 조선시대 여성 교육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양반 가문의 여성도 충분한 교육을 받으면 경학을 이해하고 가르칠 수 있었다. 고성이씨는 이를 증명했다.
하지만 그 교육의 목적은 자신의 학문적 성취가 아니라 아들의 교육이었다. 여성은 아무리 학문이 뛰어나도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고, 관직에 나갈 수 없었으며, 공적 영역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고성이씨의 학문은 사적 공간에 갇혀야 했다.
그러나 조선이 기울고 대한제국이 일제의 침탈에 의해 식민통치에 들어간 후 3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석주 이상용의 조상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명문가의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측면도 있다.
만약 고성이씨가 남성으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그녀의 학문적 재능으로 보아 충분히 대학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이었기에, 그녀는 아들을 통해서만 자신의 학문을 실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많은 아쉬움도 남는다.
4.5. 고성이씨의 교육 철학
고성이씨의 교육관은 서성의 글에서 단편적으로 확인된다.
① 학문의 목적
"학문은 출세의 도구가 아니라 인격 수양의 방법이다" 과거 급제와 입신양명이 아니라 도덕적 인간이 되는 것을 강조했다.
② 효제의 강조
"효도와 우애는 모든 덕의 근본이다" 유교 윤리의 핵심 가치를 자녀 교육의 중심에 두었다.
③ 경(敬) 공부
"항상 마음을 조심하고 몸가짐을 삼가라" 성리학의 수양론을 실천적으로 가르쳤다.
④ 검소한 생활
"사치는 가문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과부로서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절약을 강조했다.
5. 역사적 의의와 교훈
5.1. 여성 지식인의 존재 증명
고성이씨의 삶은 조선시대에도 여성 지식인이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비록 그녀의 저술은 전해지지 않지만, 아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그녀의 학문적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
이황이나 이이 같은 당대 최고의 학자가 서성의 학문적 기초를 칭찬한 것은, 고성이씨의 교육이 전문가 수준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녀는 단순히 글자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경학의 원리를 이해시키고 성리학적 사유를 훈련시켰다.
5.2. 과부의 자립과 한계
고성이씨는 29세에 과부가 되어 52년을 홀로 살았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웠고, 사회적으로도 취약한 위치였다. 하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아들 교육에 전념했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과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매우 제한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고성이씨는 재가하지 않고, 자신의 삶이 아니라 아들의 성공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그녀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조선시대 과부는 수절(守節)을 강요받았다. 재가는 법적으로 가능했지만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았다. 특히 양반 가문의 과부는 재가하면 가문의 치욕으로 여겨졌고, 자녀들도 사회적 차별을 받았다.
5.3. 교육의 힘
고성이씨의 사례는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아버지 없이 자란 서성이 대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교육 덕분이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어도, 교육을 통해 가문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
이는 현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정 환경이 어렵더라도, 좋은 교육이 제공된다면 계층 이동이 가능하다. 고성이씨는 교육이 가장 확실한 투자임을 400년 전에 증명했다.
다만, 지역간, 세대간, 그리고 빈부의 격차에 따른 교육기회가 차별화되고, 이로인하여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출발점이 점점 멀어지는 오늘날의 세태가 안타까울 뿐이다.
5.4. 기록되지 않은 여성들
고성이씨는 그나마 기록에 남은 경우다. 아들이 유명한 학자가 되었기에 간접적으로나마 그녀의 삶이 전해진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역사에서 지워졌을까?
학문적으로 뛰어났지만 아들이 없어서, 혹은 아들이 성공하지 못해서 기록되지 못한 여성들이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고성이씨의 저술 『여훈』이 소실된 것처럼, 조선시대 수많은 여성 지식인의 작품들이 사라졌다.
역사는 승자의, 남성의, 권력자의 기록이다. 고성이씨 같은 여성 지식인들은 운이 좋아야 기록에 남을 수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목소리를 잃어버렸는가?
다행히 2009년에 ‘도서출판 솟대’에서 <옛날 옛적 장애위인 시리즈 01>편에서 저자 방귀희가 서성(徐渻)과 고성이씨(固城李氏) 부인의 얘기를 다룬 책 『정경부인이 된 맹인 이씨부인』이 출판 되었다.
5.5. "현모양처"를 넘어서
고성이씨를 단순히 "현모양처"로만 기억하는 것은 그녀를 축소하는 것이다. 그녀는 교육자였고, 학자였으며, 가문의 리더였다. 남편을 잃고도 좌절하지 않고 52년을 살아낸 강인한 여성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현모양처"라는 말은 여성을 가정에 가두는 이데올로기로 비판받는다. 하지만 고성이씨의 시대에 그것은 여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녀는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고성이씨를 21세기의 잣대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16세기 조선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동시에 그녀가 겪었던 제약이 오늘날에도 다른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는지 성찰해야 한다.
마무리
고성이씨는 29세에 과부가 되어 81세까지 52년을 홀로 살았지만, 학문으로 아들을 키워 조선 최고의 학자로 만들었다. 그녀는 직접 경학을 가르쳤고, 성리학의 핵심 개념들을 전수했으며, 평생 학문을 강조하는 가풍을 세웠다. 안동장씨 장계향, 전주이씨 이빙허각과 함께 조선 3대 현모양처로 칭송받지만, 이 호칭 자체가 그녀를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로만 한정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고성이씨에 대한 기록은 주로 아들 서성의 문집과 후대 족보에 의존한다. 그녀가 저술한 『여훈』은 소실되었고, 시문도 전해지지 않는다. 이는 조선시대 여성 지식인의 업적이 얼마나 쉽게 역사에서 지워지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다. 아무리 뛰어난 학문을 가졌어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었고, 그 결과 그녀의 목소리는 아들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전해진다.
현대적 관점에서 고성이씨는 독립적 교육자이자 지식인으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그녀는 남편 없이 자녀를 키웠고,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교육에 투자했으며, 스스로 학문적 권위를 확립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유교적 가부장제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고, 자신의 학문을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한계도 명확하다.
고성이씨의 삶은 교육의 힘을 증명한다. 가정 환경이 어려워도 좋은 교육은 계층 이동을 가능하게 한다. 그녀는 경제적 자본이 아니라 문화적 자본으로 가문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녀의 사례는 여성 지식인이 역사에서 어떻게 지워지는지, "현모양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여성을 사적 영역에 가두는지를 보여준다.
고성이씨는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한 여성이었다. 그녀를 단순히 "좋은 어머니"로만 기억하는 것은 그녀를 축소하는 것이다. 그녀는 교육자였고, 학자였으며, 52년을 홀로 살아낸 강인한 생존자였다. 우리는 그녀의 이름이 아니라 "서성의 어머니"로만 불린다는 사실에서, 여성이 역사에서 어떻게 익명화되는지를 배워야 한다.
문헌 출처
<1차 사료 (정사 및 문집)>
1. 서성, 『우복집(愚伏集)』
2. 『동래서씨세보(東萊徐氏世譜)』
3. 이황, 『퇴계집(退溪集)』
4. 『서성 묘갈명(徐渻墓碣銘)』
5.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2차 사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성(徐渻)" 항목, 한국학중앙연구원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성이씨" 항목, 한국학중앙연구원
3. 한국고전번역원, 『우복집』 번역본
4. 이숙인, 『조선시대 여성 지식인 연구』,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5. 김경미, 『조선시대 여성 교육론』, 집문당, 2004
6. 정지영, "서성의 학문과 사상", 『퇴계학논집』 15, 2015
7. 박혜숙, "조선시대 현모양처 담론 비판", 『여성학연구』 22-1, 2012
8. 강명관,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2003
9. Lee, Sook-in, "Women Intellectuals in Joseon Dynasty", Korean Studies Review, 2010
10. "Virtuous Mothers in Korean Confucian Tradition", Journal of Asian Women's Studies, 2008
11. 방귀희, 『정경부인이 된 맹인 이씨부인』, 도서출판 솟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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