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1세에 스스로 "허공에 기대선 여자"라는 뜻의 호 '빙허각'을 지었고, 4남 7녀 중 8명을 잃는 비극 속에서도 한국 최초의 한글 여성백과사전 『규합총서』를 저술했다. 80여 종의 책을 참고하여 의식주부터 농사, 육아, 의학까지 담은 실학서를 남겼고, 남편 서유본이 사망하자 절명사를 쓰고 19개월 만에 뒤따라 세상을 떠났다. 한국실학학회가 선정한 유일한 여성 실학자, 빙허각 이씨는 누구였을까.
1. 출생과 성장
1.1. 세종대왕 후손으로 태어나다
빙허각 이씨는 1759년(영조 35년) 2월 24일(음력 1월 27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 이씨로, 조선 세종의 17번째 아들 영해군 이장(李塘)의 후손이다. 본명은 전하지 않는다.
아버지 이창수(李昌洙, 1713-1792)는 병조판서, 이조판서, 홍문관 제학 등을 역임한 고위 관료이자 학자였다. 영조 때 평양감사를 지냈으며, 소론의 명망 높은 인물이었다. 어머니는 문화 유씨로, 유명한 실학자이자 한글학자인 유희(柳僖, 1773-1837)의 고모였다.
빙허각 이씨는 막내딸로 태어났다. 오빠 이병정은 학자로 이름을 날렸고, 집안은 대대로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외가도 실학 및 고증학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집안이었다.
주목할 점은 빙허각 이씨의 외숙모가 『태교신기(胎敎新記)』를 지은 사주당 이씨(師朱堂 李氏, 1739-1821)라는 것이다. 사주당 이씨의 아들이 바로 유희다. 이렇게 빙허각 이씨는 친가와 외가 모두 뛰어난 학자들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자랐다.
1.2. 총명한 어린 시절
빙허각 이씨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기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젖니를 갈 무렵에는 자신의 이가 다른 아이보다 늦게 갈린다고 스스로 이빨을 뽑을 정도로 고집이 세고 당찼다.
아버지 이창수는 딸의 재능을 알아보고 어려서부터 다양한 학문을 가르쳤다. 이는 조선시대로서는 매우 예외적인 일이었다. 대부분의 양반가 여성은 한글로 쓴 『소학』 정도만 배웠지만, 빙허각 이씨는 아버지로부터 직접 경서와 사서를 배웠다.
집안에는 항상 많은 장서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고위 관료였고, 학자들과 교유했기에 집에 책이 넘쳐났다. 빙허각 이씨는 이러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책을 읽으며 성장했다.
1.3. 11세, 스스로 호를 짓다
1769년, 빙허각 이씨 11세 때 스스로 호를 지었다. '빙허각(憑虛閣)'이다. 기댈 빙(憑), 허공 허(虛), 집 각(閣)으로, 직역하면 '허공에 기대선 집'이라는 뜻이다. 이는 매우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조선시대 여성이 스스로 호를 짓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더욱이 11세 어린 나이에 호를 지었다는 것은 그녀의 조숙함과 자의식을 보여준다. '허공에 기대선'이라는 표현은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을 연상시킨다. 또한 도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과도 통한다.
유교 집안의 딸이 불교·도교적 이름을 지은 것은 그녀의 사상이 유교에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호가 여성으로 태어나 의지할 곳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조선 사회에서 여성은 아버지, 남편, 아들에게 의존해야 했다. 하지만 빙허각 이씨는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허공에 홀로 서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일 수 있다.
2. 결혼과 가정생활
2.1. 15세의 결혼
영조 49년(1773년), 빙허각 이씨 15세에 달성 서씨(達城徐氏) 서유본(徐有本, 1762-1822)과 결혼했다. 서유본은 빙허각보다 3세 연하였다. 결혼 당시 신부는 15세, 신랑은 12세였다. 서유본의 자는 자온(子穩), 호는 좌소산인(左蘇山人)이다. 시가는 대구 서씨 명문가로, 서유본의 집안 역시 다수의 실학자를 배출한 가문이었다. 특히 서유본의 동생이 바로 『임원경제지』를 저술한 풍석 서유구(徐有榘, 1764-1845)다.
나이 차이도 있고 신랑이 어렸지만, 시가는 장서가 풍부하고 학문적 분위기가 뛰어났다. 빙허각 이씨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없었다. 그녀는 시댁의 방대한 장서를 읽으며 견문을 넓혔다.
2.2. 시동생 서유구를 가르치다
빙허각 이씨는 어린 시동생 서유구를 직접 가르쳤다고 전한다. 서유구는 형수보다 5세 어렸다. 형 서유본이 12세에 결혼했으니, 동생 서유구는 9세 무렵이었을 것이다. 후에 서유구는 조선 최고의 실학자가 되어 『임원경제지』 113권을 저술했다. 이 방대한 백과사전의 뿌리에는 형수 빙허각 이씨의 가르침이 있었다.
서유구는 평생 형수를 존경했고, 형수의 학문적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2.3. 자녀 4남 7녀 중 8명의 죽음
빙허각 이씨는 슬하에 4남 7녀, 총 11명의 자녀를 낳았다. 하지만 그중 8명이 어려서 죽고, 아들 1명과 딸 2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는 상상하기 어려운 비극이었다. 당시 영아 사망률이 높았지만, 11명 중 8명이 죽은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아이들의 연이은 죽음 앞에서 빙허각 이씨는 슬픔을 견디지 못했다. 그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그때마다 남편 서유본이 그녀를 말렸고, 사랑으로 그녀를 살려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은 그녀를 학문으로 이끌었다. 슬픔을 승화시키는 방법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빙허각 이씨의 학문적 성취는 자식들의 죽음 속에서 이루어졌다.
2.4. 학문적 동지, 서유본
남편 서유본은 빙허각 이씨의 학문적 재능을 존중했고, 평생 동안 학문적 동지 관계를 유지했다.
두 사람은 한시를 주고받을 만한 시재가 있었다고 전한다. 서유본의 문집 『좌소산인문집(左蘇山人文集)』에는 아내와 주고받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부부가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소통한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로서는 매우 드문 부부관계였다.
빙허각 이씨는 직접 길쌈을 하여 남편의 옷을 만들고, 백화주를 담가 남편과 시를 나누었다. 남편 서유본은 평생에 걸쳐 벼슬을 스스로 포기하고 아내의 학문적 성취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3. 집안의 몰락과 『규합총서』 탄생
3.1. 갑작스러운 몰락
1806년(순조 6년), 빙허각 이씨 47세 때 집안에 큰 변고가 생겼다. 남편의 숙부 서형수가 옥사에 연루된 것이다. 서유본은 43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벼슬에 올랐으나, 숙부의 옥사 때문에 벼슬에서 일찍 물러나야 했다. 갑자기 집안이 경제적으로 곤궁해졌다. 고위 관료 집안이었던 서씨 가문은 하루아침에 몰락했다.
빙허각 이씨는 손수 차 밭을 일구어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양반가 부인이 직접 농사를 짓는 것은 매우 굴욕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빙허각 이씨는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시기에 일상생활에 필요한 옛 글을 구해보며 견문을 넓혔다.
3.2. 『규합총서』 저술 시작
생활이 조금 안정되자, 빙허각 이씨는 모든 경험을 책으로 남기고자 마음먹었다. 1806년경부터 저술을 시작하여 1809년(순조 9년), 51세에 『규합총서(閨閤叢書)』를 완성했다.
3년에 걸친 작업이었다. '규합(閨閤)'은 여성이 거처하는 공간을 가리키고, '총서(叢書)'는 풍부한 지식을 담고 있는 많은 분량의 책을 뜻한다. 즉 '여성의 공간에서 필요한 모든 지식을 담은 책'이라는 의미다.
『규합총서』는 총 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 봉임칙(奉任則): 부인의 직분과 도리
제2권 주찬: 술 빚는 법
제3권 봉제: 바느질과 옷 만드는 법, 염색법
제4권 청낭결(靑囊訣): 태교, 육아, 의학, 응급처치
제5권 술수략(術數略): 길흉을 점치는 법, 부적 쓰는 법.

3.3. 80여 종의 참고문헌
빙허각 이씨는 『규합총서』를 쓰기 위해 80여 종에 가까운 책을 참고했다. 『동의보감』, 『맹자』, 『주역』, 『본초강목』, 『산림경제』, 『증보산림경제』, 『사민필지』 등 의학서, 경서, 농서, 실학서를 망라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서양 문물까지 참고했다는 것이다.
18세기 조선에 들어온 서학(西學) 관련 지식도 『규합총서』에 반영되어 있다. 이는 빙허각 이씨의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빙허각 이씨는 단순히 책의 내용을 베끼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실험하고 실행해본 결과를 기록했다. "이것은 내가 직접 해보니 효과가 있었다", "이것은 책에는 이렇게 나오지만 내 경험으로는 이렇다"는 식의 서술이 많다.
이는 실학(實學)의 핵심인 '실사구시(實事求是)'정신이다. 책에만 의존하지 않고 직접 경험하고 검증한다. 빙허각 이씨가 여성 실학자로 불리는 이유다.
3.4. 한글로 쓴 최초의 여성 백과사전
『규합총서』의 가장 큰 특징은 한글로 쓰였다는 점이다. 당시 대부분의 책은 한문으로 쓰였다. 한문을 모르는 여성은 책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빙허각 이씨는 처음부터 여성을 주 독자층으로 설정하고 한글로 책을 썼다. 서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부녀자들이 한문을 몰라도 쉽게 읽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한글로 쓴다." 이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지식을 독점하지 않고 여성들과 공유하겠다는 의지였다. 조선 후기 실학의 대두는 '실사구시'적 관심으로 전환되면서 집안의 물질적인 조건과 관리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고, 그 살림을 주관하는 여성의 일과 경험을 지식화할 필요가 있었다.
『규합총서』는 한국 최초의 한글 여성백과사전이자,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여성이 쓴 백과사전이다.
3.5. 남편이 제목을 짓다
『규합총서』라는 제목은 남편 서유본이 직접 지어주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학문적 업적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를 보여준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남편은 아내가 글을 쓰는 것을 금지했다. 여자가 글을 쓰면 집안 망신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서유본은 달랐다. 그는 아내의 저술을 적극적으로 도왔고, 직접 제목까지 지어주었다.
서유본은 아내의 책을 읽고 감탄했다. 그는 동생인 서유구에게 "형수의 『규합총서』를 읽어보라. 우리가 모르는 많은 지식이 담겨있다"고 권했다고 전한다.
4. 여성 실학자로서의 성취
4.1. 『청규박물지』와 『빙허각고』
빙허각 이씨는 『규합총서』 외에도 여러 책을 저술했다.
『빙허각전서(憑虛閣全書)』 3부 11책이 전해진다:
제1부: 『규합총서』 5책 (1809년)
제2부: 『청규박물지(淸閨博物志)』 4책
제3부: 『빙허각고(憑虛閣稿)』
안타깝게도 현재 전하는 것은 제1부 『규합총서』와 일본 동경대학 오구라문고 소장 『청규박물지』뿐이다. 『빙허각고』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청규박물지』는 자연물에 대한 박물학적 지식을 담은 책이다. 화초, 나무, 동물, 광물 등을 분류하고 설명했다.
이는 빙허각 이씨의 관심이 단순히 가정생활에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빙허각고』에는 빙허각 이씨의 자작시 백수십 수가 수록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그 시에 한글로 대역주를 붙여놓았다. 이 책이 발견된다면 빙허각 이씨의 문학적 재능을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4.2. 서유구와의 비교
빙허각 이씨의 시동생 서유구는 『임원경제지』 113권을 저술한 조선 최고의 실학자다.
두 사람의 저술을 비교하는 것은 흥미롭다. 『규합총서』와 『임원경제지』의 항목과 주제는 겹치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관점이나 서술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염색에 대한 항목에서 '쪽빛'을 형식적이고 간략하게 처리한 서유구와는 달리, 빙허각 이씨는 5배 이상의 분량을 할애하여 상세하고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즉 동일 항목이라 하더라도 남성의 설명과는 달리 빙허각 이씨의 지식에는 여성의 섬세하고 예리한 특수성이 반영되어 있다. 여성으로 산 50년의 경험과 관점이 담긴 것이다.
4.3. 한국실학학회가 선정한 유일한 여성
한국실학학회는 한국 실학자 33인을 선정했다. 그 중 유일한 여성이 바로 빙허각 이씨다. 2015년 한·중·일 3개국 실학학회 제13회 국제학술회의에서 '동아시아 실학사상가 99인'을 발간했다. 여기에도 빙허각 이씨가 포함되었다. 2019년에는 초등학교 6학년 사회 국정교과서에 '빙허각 이씨'가 '역사 속 여성'으로 유일하게 등재되었다.
이는 빙허각 이씨가 단순한 요리책 저자가 아니라, 실학자로 공식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5. 사랑과 죽음
5.1. 남편의 죽음
순조 22년(1822년) 8월 26일(음력 7월 10일), 남편 서유본이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빙허각 이씨는 64세였다.
남편의 죽음을 맞아 빙허각 이씨는 「절명사(絶命詞)」를 지었다. 절명사란 죽음을 각오하고 쓴 글이다. 남편을 따라 죽겠다는 결심을 담은 것이었다.
빙허각 이씨는 절명사를 쓴 후 모든 인사(人事)를 끊었다. 머리를 빗지 않고, 얼굴을 씻지 않고, 자리에 누워 지냈다. 음식도 거의 먹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평생을 함께 한 남편 없이는 살 수 없었다. 두 사람은 50 여 년을 함께 살았고, 학문적 동지이자 영혼의 반려였다.
5.2. 19개월 후
1824년 3월 3일(음력 2월 3일), 빙허각 이씨는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사망한 지 19개월 만이었다. 19개월 동안 그녀는 죽음을 기다렸다. 음식을 거부하고, 몸을 돌보지 않으면서 서서히 죽어갔다. 이는 자살이 아니라,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시동생 서유구는 형수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다. 그는 형수의 묘지명 「수씨단인이씨묘지명(嫂氏端人李氏墓誌銘)」을 직접 지었다. 이 묘지명 덕분에 우리는 빙허각 이씨의 생애를 알 수 있다.
5.3. 부부의 사랑
빙허각 이씨와 서유본의 사랑은 그 어떤 러브스토리에도 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절절하고 뜨겁다.
두 사람은 15세와 12세에 결혼하여 평생을 함께 했다. 8명의 자녀를 잃는 비극 속에서도 서로를 위로하고 지탱했다. 집안이 몰락했을 때도 함께 차밭을 일구며 살았다.
서유본은 벼슬을 포기하고 아내의 학문을 도왔다. 아내가 책을 쓸 수 있도록 집안일을 돌보고, 책의 제목도 지어주었다. 조선시대 남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빙허각 이씨는 남편을 위해 직접 길쌈을 하여 옷을 만들고, 백화주를 담가 함께 시를 나누었다. 남편이 죽자 19개월 만에 뒤따라 죽었다. 이는 단순한 의리나 효가 아니었다. 진정한 사랑이었다. 50년을 함께 살며 서로의 영혼을 알아본 부부였다.
6. 역사적 재평가
6.1. 여성의 특수성을 방법론으로
빙허각 이씨를 여성 실학자로 호명하는 것은 자신의 여성 정체성을 일상 연구의 방법론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빙허각 이씨는 여성의 눈과 관심으로 패물이나 외모를 꾸미는 재료를 자연 속에서 찾아내고, 실험과 실증을 통해 하나의 지식으로 체계화하였다. 이는 남성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남성 실학자들은 주로 농업, 상업, 정치, 군사를 연구했다. 하지만 빙허각 이씨는 여성의 일상, 즉 요리, 육아, 의복, 의학, 미용을 연구했다. 이는 여성의 삶을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6.2. 오랫동안 잊혀진 이유
빙허각 이씨는 조선 유일의 여성 실학자였지만, 오랫동안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유는 명확하다.
첫째, 여성이라는 이유로 학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아무리 뛰어난 책을 써도 여성의 저술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둘째, 『규합총서』가 가정생활을 다룬다는 이유로 "여자들이나 보는 책"으로 폄하되었다. 실학은 남성의 학문이고, 요리와 육아는 학문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셋째, 본명조차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여성은 대부분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 빙허각 이씨도 본명을 알 수 없고, 오직 호(號)로만 불린다.
6.3. 21세기의 재발견
2000년대 들어 빙허각 이씨는 재발견되기 시작했다. 2015년 한국실학학회가 선정한 실학자 33인에 유일한 여성으로 포함되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2018년 정해은의 『빙허각, 세상의 중심에 서다』가 출간되어 대중에게 빙허각 이씨를 소개했다. 소설 형식으로 쓰여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2019년 초등학교 6학년 사회 교과서에 '빙허각 이씨'가 등재되었다. 신사임당,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 여성으로 소개되었다.
학계에서는 빙허각 이씨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규합총서』는 실학 연구, 여성학 연구, 한글학 연구, 음식학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페미니즘 관점에서 빙허각 이씨를 재해석하는 연구들이 많다. 여성의 일상을 학문으로 승화시킨 점, 여성을 위해 한글로 책을 쓴 점, 남편과 평등한 관계를 유지한 점 등이 주목받고 있다.
6.4. 장계향과의 비교
비슷한 시기에 장계향은 『음식디미방』을, 빙허각 이씨는 『규합총서』를 저술했다.
두 책을 비교하는 것은 흥미롭다.
장계향 『음식디미방』 (1670): 73세 저술 146가지 조리법 음식에 특화 경북 영양 지역 필사본 1종
빙허각 이씨 『규합총서』 (1809): 51세 저술 의식주·육아·의학 등 백과사전 80여 종 참고문헌 서울 양반가 3부 11책
두 사람 모두 여성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장계향은 음식에 집중했고, 빙허각 이씨는 여성의 전 생애를 다루었다.
장계향은 후손들을 위해 썼고, 빙허각 이씨는 모든 여성을 위해 썼다. 『
음식디미방』은 가문 내에서 전승되었지만, 『규합총서』는 널리 유포되어 많은 여성들이 필사했다.
6.5. 현대적 의미
빙허각 이씨의 삶은 현대 여성에게도 시사점을 준다.
첫째, 여성의 일상과 경험도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요리, 육아, 의복은 사소한 것이 아니라 체계적 지식이다.
둘째, 지식은 공유되어야 한다. 빙허각 이씨는 자신이 아는 것을 한글로 써서 모든 여성과 나누었다.
셋째, 비극적 상황에서도 학문적 성취가 가능하다. 8명의 자녀를 잃고 집안이 몰락했지만, 빙허각 이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넷째, 부부가 서로 존중하고 지원할 때 위대한 업적이 탄생한다.
서유본이 아내의 학문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규합총서』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7. 죽음과 유산
7.1. 66세의 생애
빙허각 이씨는 1824년 3월 3일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는 남편 서유본과 합장되어 경기도 파주에 있다.
시동생 서유구가 쓴 묘지명 덕분에 우리는 빙허각 이씨의 생애를 알 수 있다. 서유구는 형수를 "단인(端人, 바르고 어진 사람)"이라 칭했다.
7.2. 『규합총서』의 전승
『규합총서』는 19세기 내내 여성들 사이에서 널리 필사되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필사본만 10여 종이 넘는다. 이는 이 책이 얼마나 많은 여성들에게 사랑받았는지를 보여준다. 1908년 유일서관에서 활자본으로 간행되어 더욱 널리 보급되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에도 여러 차례 재간행되었다. 1975년 보진재에서 영인본을 출간했고, 1987년 정양완이 『규합총서 역주』를 출간하여 현대어 번역본을 제공했다.
7.3.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추진
2021년 문화재청은 『규합총서』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한글 백과사전으로서의 가치, 여성 실학자의 저술이라는 의의, 음식 문화사적 중요성 등이 인정받고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경북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원본과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7.4. 문화 콘텐츠화
2018년 정해은의 소설 『빙허각, 세상의 중심에 서다』가 출간되어 빙허각 이씨를 소재로 한 최초의 문학 작품이 탄생했다. 일부에서는 빙허각 이씨를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 제작을 제안하고 있다. 11세에 호를 짓고, 8명의 자녀를 잃고, 집안이 몰락하여 차밭을 일구고, 한글 백과사전을 저술하고, 남편이 죽자 19개월 만에 뒤따라 죽은 이야기는 충분히 극적이다.
하지만 아직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지 않았다. 빙허각 이씨가 대중에게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무리
빙허각 이씨는 11세에 스스로 "허공에 기대선 여자"라는 호를 짓고, 4남 7녀 중 8명이 죽는 비극 속에서도 80여 종의 책을 참고하여 한국 최초의 한글 여성백과사전 『규합총서』를 저술했다. 의식주부터 농사, 육아, 의학까지 여성의 일상을 학문으로 승화시켜 한국실학학회가 선정한 유일한 여성 실학자가 되었으며, 남편 서유본이 사망하자 절명사를 쓰고 19개월 만에 뒤따라 세상을 떠났다.
장계향보다 백과사전적 범위가 넓고 실학적 방법론이 체계적이었으나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21세기 들어 재발견되고 있다.
문헌 출처
<1차 사료 (정사 및 문집)>
1. 빙허각 이씨, 『규합총서(閨閤叢書)』, 1809년 필사본
2. 빙허각 이씨, 『청규박물지(淸閨博物志)』, 동경대학 오구라문고 소장
3. 서유본, 『좌소산인문집(左蘇山人文集)』
4. 서유구,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113권
5. 서유구, 「수씨단인이씨묘지명(嫂氏端人李氏墓誌銘)」
6. 『순조실록(純祖實錄)』
<2차 사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 항목, 한국학중앙연구원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규합총서(閨閤叢書)" 항목
3. 서울대학교 규장각, 『규합총서』 원본 소장
4. 정양완, 『규합총서 역주』, 보진재, 1987
5. 한국실학학회, "한국 실학자 33인", 2015
6. 한·중·일 실학학회, "동아시아 실학사상가 99인", 2015
7. 교육부, 초등학교 6학년 사회 교과서, 2019
8. 정해은, 『빙허각, 세상의 중심에 서다』, 푸른역사, 2018
9. 김상보, 「빙허각 이씨의 생애와 사상」, 『한국실학연구』 20, 2010
10. 이숙인, 「규합총서의 실학적 성격」, 『실학사상연구』 35, 2012
11. 송지원, 「빙허각 이씨와 서유구의 실학 비교」, 『한국사상사학』 45, 2013
12. 정지영, 「규합총서의 한글학적 가치」, 『한글학회 학술대회』, 2014
13. 박혜숙, 「여성 실학자 빙허각 이씨 연구」, 『여성문학연구』 40, 2017
14. 김명희, 「규합총서와 음식디미방 비교 연구」,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35, 2017
15. 윤숙자, 「규합총서의 음식문화사적 의의」,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 32, 2017
16. 이혜순, 「빙허각 이씨: 잊혀진 여성 실학자」, 『역사비평』 125, 2018
17. 한국학중앙연구원, "규합총서 국역 사업", 2020
18. 문화재청, "규합총서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검토", 2021
19. Bingheo-gak Lee, "Gyuhap Chongseo", Korean Women's Encyclopedia, 2016
20. Seo, Yugu, "My Sister-in-law, the Scholar", Joseon Dynasty Memoirs,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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