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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열전 074] 임윤지당 (任允摯堂)-조선 최고의 여성 성리학자

by 느티나무곽교수 2025. 12. 26.

조선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성리학자로, 19세에 결혼하여 8년 만에 과부가 되었고 딸마저 잃었지만, 평생 성리학을 연구하여 『윤지당유고』를 남겼다. "남녀는 하늘로부터 동등한 성품을 받았으므로 여성도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동생 임정주는 누나를 "규중의 도학이요, 여인들 중의 군자"라 극찬했다. 과연 임윤지당은 누구였을까.

1. 출생과 성장

1.1. 명문 성리학 가문의 딸

임윤지당은 1721년(경종 1년) 경기도 안성 양성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풍천(豊川), 호는 윤지당(允摯堂)이다. 본명은 전하지 않는다. 아버지 임적(任適, 1685-1728)은 함흥판관을 지냈다. 고조할아버지 임의백(任義伯)은 송시열의 친구이자 동문이었고, 집안은 기호학파 성리학의 적통을 이은 명문이었다.

어머니 파평 윤씨는 호조정랑을 지낸 윤부(尹扶)의 딸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임윤지당은 5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큰오빠 임명주(任命周)는 사간원 정언을, 둘째오빠 임성주(任聖周, 1711-1788)는 조선 후기 대 성리학자 녹문(鹿門)으로, 넷째오빠 임경주는 문장에 뛰어났고, 막내동생 임정주(任靖周, 1727-1796)는 운호(雲湖)로 불린 성리학자였다.

한 집안에서 3명의 성리학자가 나온 것이다.

1.2. 유년기의 비극

1725년(5세), 아버지가 함흥판관으로 부임하자 가족도 함께 함흥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재판 과정에서 기생을 매질한 것이 문제가 되어 탄핵을 받고 관직을 떠나야 했다. 1728년(8세) 봄,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온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려 청주로 이사 준비를 하던 중 전염병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임윤지당은 8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1729년(9세), 가족은 청주 근처 옥화(玉華)라는 산골 마을로 이사했다. 홀어머니 아래서 어려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임윤지당은 오빠들로부터 본격적인 학문 교육을 받게 되었다.

1.3. 둘째오빠 임성주의 교육

아버지가 사망한 후, 당시 18세였던 둘째오빠 임성주가 부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여동생의 재능을 일찍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교육했다. 임성주는 임윤지당에게 『효경(孝經)』, 『열녀전(列女傳)』, 『소학(小學)』, 사서(四書) 등의 유교 경전과 중국 역사서를 가르쳤다.

임윤지당은 낮에는 일상생활을 하고, 밤마다 공부했다. '윤지당(允摯堂)'이라는 호도 오빠 임성주가 지어준 것이다. 주자의 "윤신지(允莘摯)"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으로, '태임(太任)과 태사(太姒)를 독실이 신봉한다'는 뜻이다. 신(莘)은 주나라 문왕의 부인 태사의 고향이고, 지(摯)는 문왕의 어머니 태임의 고향이다.

신사임당의 '사임(師任)'도 태임을 본받는다는 뜻이니, 두 사람의 호는 유래가 비슷하다. 유교에서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제시하는 태임과 태사를 본받으라는 의미였다.

1.4. 여러 형제들과의 강론

임윤지당은 여러 형제들과 함께 경서와 역사서를 강론했다. 식견이 탁월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여성은 한글로 쓴 『소학』 정도만 배우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임윤지당은 남성 선비와 동등한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야사에 따르면 임윤지당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근면했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인정이 많아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어려서부터 교양과 부덕을 쌓아 예의범절에 어긋남이 없었다.

1737년(17세), 가족은 조상들의 선영이 있는 여주(驪州)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2년을 보낸 후 원주로 시집을 갔다.

2. 결혼과 과부의 삶

2.1. 19세의 결혼

1739년(영조 15년), 임윤지당 19세에 원주의 선비 신광유(申光裕, 1722-1747)와 결혼했다. 신광유는 임윤지당보다 한 살 어렸다. 시가는 평산 신씨로, 영의정을 지낸 신중만·신중회 형제와 일가인 명문가였다. 임윤지당이 시댁에 들어가 사당에 예를 표할 때 법도에 한 치도 어긋나는 점이 없었다.

시숙부 선릉참봉 신저는 "나이도 어리고 체구도 작은데 처신을 보니 의젓함이 태산교악과 같다"고 감탄했다. 결혼 후 임윤지당은 낮에는 부녀자의 일에 진력하고, 밤이 깊어서는 소리를 낮추어 조용히 책을 읽었다. 공부하는 티를 내지 않았기에 가족들도 그녀의 학문 진취를 알지 못했다.

2.2. 8년 만의 비극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결혼한 지 8년 만인 1747년(영조 23년), 남편 신광유가 27세의 한창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임윤지당은 27세에 과부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마저 어렸을 때 사망했다. 자식 하나 없이 청상과부가 된 것이다.

10년 후, 임윤지당은 남편이 필사하다 중지한 『시경(詩經)』과 『초사(楚辭)』를 이어 쓰면서 단장의 아픔을 달랬다. 남편의 필사를 완성하는 것이 그를 기리는 방법이었다.

2.3. 두 시어머니를 모시다

남편 신광유는 일찍이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갔다. 따라서 임윤지당은 생가(生家)와 양가(養家)의 두 시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임윤지당은 두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효성이 지극하고 인정이 많아 시댁 식구들의 존경을 받았다.

두 시동생이 모든 일을 형수님에게 물어서 하고 어머니처럼 섬길 정도였다. 큰 시동생 신광우(申光祐)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한 엘리트 관료였다. 이러한 시동생들도 형수를 공경하고 존중했다는 것은, 임윤지당의 인품과 학식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준다.

2.4. 양자의 비극

40세 무렵, 임윤지당은 신광우의 큰아들 신재준(申在竣, 1760-1787)을 양자로 입양했다. 젖 뗄 무렵부터 데려다 친자식처럼 사랑으로 양육했다. 하지만 신재준도 28세의 한창 나이에 1남 2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양자가 자신보다 6년 먼저 죽은 것이다.

임윤지당은 비통함을 숨기지 못했다. 동생 임정주의 기록에 따르면, 임윤지당은 자신의 삶을 "타고난 운명이 박복하였다"고 탄식했다. 8세에 아버지를 잃고, 27세에 남편을 잃고, 딸도 잃고, 양자마저 먼저 보냈다.

연이은 죽음 속에서도 그녀는 학문으로 슬픔을 승화시켰다.

3. 성리학 연구와 저술

3.1. 학문에 대한 열정

임윤지당은 젊었을 때부터 학문을 사랑했다. 그녀는 자서(自序)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릴적부터 성리학이란 학문이 있음을 알았다. 조금 자라서는 고기 맛이 입을 즐겁게 하듯이 학문을 좋아하여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이에 감히 아녀자의 분수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경전에 기록된 것과 성현의 교훈을 마음을 다해 탐구하였다."

"아녀자의 분수에 구애받지 않고" 학문을 탐구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과격한 발언이었다. 조선 사회는 여성이 학문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3.2. 존심양성의 경지

임윤지당의 학문적 수양은 일상생활에서도 드러났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둘째오빠 임성주가 양근 군수로 재직할 때, 조카들이 별당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임윤지당이 원주에서 와서 관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조카들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드렸다. 하루는 임윤지당이 "오늘 공부는 어떠하냐?"고 물으니 조카는 "날이 더워 고통을 견딜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부채질을 하느냐?" "그렇습니다." 임윤지당이 말했다. "정신을 집중해서 책을 읽으면 가슴에서 자연히 서늘한 기운이 생기는데, 부채질할 이유가 있겠는가? 너희들이 아직도 헛된 독서를 면치 못했구나."

동생 임정주는 이 이야기를 기록하며 "이 한 마디 말씀으로 미루어보면 누님의 존심양성(存心養性)하신 수양의 경지를 가히 알 수 있다"고 썼다.

3.3. 『윤지당유고』

1793년(정조 17년), 임윤지당은 73세의 나이로 원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후 3년 후인 1796년, 동생 임정주가 누나의 저술을 정리하여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를 상하 2편 1책의 목활자본으로 간행했다.

『윤지당유고』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상편: 전(傳) 2편: 인물 전기 역사 인물 논평 11편 설(說) 6편: 학술 논문 발문(跋文) 2편

하편: 잠(箴) 4편: 자기 수양서 명(銘) 3편 찬(讚) 1편 제문 3편 인(引) 1편: 저자 서문 경의(經義) 2편: 유교 경전 해석서 부록: 언행록 유사(遺事) 발문 2편

『윤지당유고』의 핵심은 성리설을 논한 설(說) 6편이다.

3.4. 6대 성리학 논문

3.4.1.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

이기론(理氣論)과 심성론(心性論)을 다룬 논문이다. 성리학의 핵심 개념인 이(理)와 기(氣), 마음과 성품에 대해 논했다. 임윤지당은 "이(理)는 형체가 없고 기(氣)는 형체가 있다"는 주자학의 기본 명제를 받아들이면서도,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으며 동시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3.4.2. 「인심도심사단칠정설(人心道心四端七情說)」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한 논문이다. 임윤지당은 "사단은 순선(純善)이고 칠정은 선악이 혼재되어 있다"는 주자학의 입장을 따르면서도, 중요한 것은 마음을 잘 다스리는 공부라고 강조했다.

3.4.3. 「예악설(禮樂說)」

예(禮)와 악(樂)의 중요성을 논한 글이다. 임윤지당은 예악이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을 다스리는 도구라고 주장했다.

3.4.4. 「극기복례위인설(克己復禮爲仁說)」

『논어』의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감이 인이다)"를 해석한 글이다. 임윤지당은 이 구절을 인용하며 "남이 한 번 노력하면 나는 천 번 노력한다"는 마음가짐으로 학문에 몰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여성으로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자각이었다.

3.4.5. 「치란재득인설(治亂在得人說)」

정치의 성패는 인재를 얻는 데 달려있다는 논문이다. 역사 속 여러 사례를 들어 인재 등용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3.4.6. 「오도일관설(吾道一貫說)」

공자의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는다)"를 해석한 글이다. 만물의 이치가 하나로 통한다는 성리학의 핵심 사상을 논했다.

3.5. 문학사적 의의

임윤지당의 『윤지당유고』는 조선시대 여성 문집 중 유일하게 성리학 논문이 11편이나 수록된 책이다. 이는 그녀가 단순한 시인이 아니라 진정한 성리학자였음을 증명한다. 조선 후기 문인들은 임윤지당을 극찬했다.

동생 임정주는 "규중의 도학(道學)이요, 여인들 중의 군자(君子)"라고 했고, 오빠 임성주는 "누이는 우리 가문이 낳은 태임이나 태사이다. 정자의 따님은 대수롭지 않다"고 말했다.

4. "여성도 성인이 될 수 있다"

4.1. 혁명적 주장

임윤지당의 가장 중요한 주장은 "여성도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명적인 발언이었다. 임윤지당은 성리학의 음양이기론(陰陽理氣論)에 기초하여 이렇게 주장했다: "남녀는 상호 보완 관계이며, 남녀 모두 공히 하늘로부터 동등한 성품을 받았다. 따라서 여성도 성인이 될 수 있다." "하늘이 명부(命賦)한 성품에는 애당초 남녀의 다름이 없다. 부인으로 태어나서 스스로 태사(太姒)와 태임(太任)과 같은 성인이 되기를 기약하지 아니하면 이는 자포자기한 사람이다." 이는 남성 우월주의가 지배하던 조선 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주장이었다. 임윤지당은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본성을 타고났으므로, 노력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4.2. 인물성동이론

논쟁 임윤지당은 당시 성리학계의 뜨거운 논쟁이었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도 참여했다. 인물성동이론은 사람과 동물의 본성이 같은지 다른지를 논하는 것이다. 호락논쟁이라고도 불리는 이 논쟁에서, 호론(湖論)은 인물성이논(人物性異論, 사람과 동물의 본성이 다르다)을 주장했고, 낙론(洛論)은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 사람과 동물의 본성이 같다)을 주장했다. 임윤지당은 호론의 입장을 따랐다.

사람의 본성은 동물과 다르며, 사람은 도덕적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여성도 수양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그녀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4.3. 실학과의 연결

일부 학자들은 임윤지당의 사상이 실학과 통한다고 평가한다. 그녀는 성리학을 연구하면서도 현실 정치에 관심을 가졌고, 「치란재득인설」에서 인재 등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그녀는 남녀 평등을 주장했는데, 이는 신분제를 비판한 실학자들의 사상과 유사하다. 박지원, 정약용 등 실학자들이 서얼 차별을 비판한 것처럼, 임윤지당은 여성 차별을 비판한 것이다.

5. 역사적 재평가

5.1. 조선 유일의 여성 성리학자

임윤지당은 조선시대 유일한 여성 성리학자다. 신사임당은 예술가였고, 허난설헌은 시인이었으며, 송덕봉과 강정일당도 시를 많이 남겼다. 하지만 성리학 논문을 남긴 여성은 임윤지당뿐이다. 당대 평가에서도 "사임당은 시에만 전념하였고, 윤지당은 저술이 널리 전파되어 가장 칭송되고 있다"고 했다. 신사임당과 직접 비교하며 임윤지당을 더 높이 평가한 것이다.

오늘날 학자들은 임윤지당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역사학자 이덕일: "우주, 사람, 사람과 사물의 이치 등의 넓은 주제를 연구하는 학자요, 고요하고 한가로워 조금도 얽매임이 없는 자유인" 문화관광부(2005): "조선후기의 여성 성리학자로 전통유교시대 남성전유물이었던 성리학을 평생 탐구하여 유교경전과 성리학 분야에 많은 업적을 이룬 인물"

5.2. 페미니즘의 선구자

임윤지당은 조선시대 페미니즘의 선구자로 재평가되고 있다. "여성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남녀 평등 사상의 핵심이다. 그녀는 여성의 학문을 정당화했다. "아녀자의 분수에 구애받지 않고" 학문을 탐구했다는 것은, 여성에게도 학문할 권리가 있다는 선언이었다.

물론 임윤지당은 현대적 의미의 페미니스트는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유교적 부덕을 강조했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으며, 남편이 남긴 필사를 완성하는 등 전통적 여성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성도 학문할 수 있고,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성차별에 도전했다. 이는 시대를 앞서간 진보적 사상이었다.

5.3. 강정일당과의 사제 관계

임윤지당 사후 51년 후에 태어난 강정일당(1772-1832)은 임윤지당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윤지당유고』를 자주 읽으며 사숙(私淑)했다. 강정일당은 임윤지당의 "여성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았고, 이를 실천했다.

두 사람은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책을 통해 정신적 사제 관계를 맺은 것이다.

이는 임윤지당의 사상이 후대에 계승되었음을 보여준다. 임윤지당-강정일당으로 이어지는 여성 성리학자의 계보는, 조선시대에도 여성 지식인의 전통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5.4. 오랫동안 잊혀진 이유

임윤지당은 조선 유일의 여성 성리학자였지만, 오랫동안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에 비해 훨씬 덜 유명했다.

이유는 명확하다.

첫째, 성리학은 대중적 관심을 받기 어려운 학문이다. 신사임당의 그림이나 허난설헌의 시는 감상하기 쉽지만, 「이기심성설」 같은 성리학 논문은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다.

둘째, 임윤지당은 원주라는 지방에서 살았고, 중앙 문단과 거리가 멀었다. 과부로 살면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기에, 생전에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셋째, 조선 사회는 여성 학자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난 성리학 논문을 써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학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5.5. 21세기의 재발견

2000년대 들어 임윤지당은 재발견되기 시작했다. 2002년 원주시와 원주문화원이 '임윤지당의 생애와 사상'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2005년 문화관광부는 임윤지당을 '5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2007년부터 원주에서는 매년 임윤지당 헌다례(獻茶禮)를 열고 있다. 2016년 연합뉴스는 임윤지당을 "조선 최초 페미니스트"로 소개했다. 2018년 강원도 원주시는 '임윤지당로'를 신설했다. 임윤지당이 살았던 원주시 지정면 일대 도로에 그녀의 이름을 붙여 기렸다.

학계에서도 임윤지당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숙인, 김영숙, 정지영, 조혜란 등 많은 학자들이 임윤지당의 철학, 문학, 페미니즘 사상을 연구하여 논문을 발표했다. 특히 페미니즘 관점에서 임윤지당을 재해석하는 연구들이 많다. 조선시대에도 여성 평등을 주장한 사상가가 있었다는 것은, 페미니즘이 서양에서 수입된 사상이 아니라 한국에도 고유한 전통이 있음을 보여준다.

6. 죽음과 유산

6.1. 73년의 생애

임윤지당은 1793년(정조 17년) 9월 3일 73세의 나이로 강원도 원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남편 신광유가 사망한 지 46년 후였다.

27세에 과부가 되어 73세까지, 무려 46년을 홀로 살았다. 묘는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 신림(新林) 야산에 남편과 합장되어 있다. 생전에 함께 하지 못했던 남편과 사후에 함께 묻힌 것이다.

6.2. 기념사업

1995년 후손들이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에 임윤지당 사당을 건립했다. 사당에는 임윤지당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2005년 문화관광부가 '5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면서 임윤지당은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2007년부터 원주시와 원주문화원은 매년 임윤지당 헌다례를 개최하고 있다. 매년 9월 3일 기일에 맞춰 사당에서 제례를 올리고, 임윤지당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를 연다. 2018년 원주시는 '임윤지당로'를 신설했다. 이는 여성 인물의 이름을 딴 도로로는 매우 드문 사례다.

임윤지당선양관-강원도 원주시
임윤지당선양관-강원도 원주시

6.3. 문화 콘텐츠화

2019년 국립중앙도서관은 『윤지당유고』를 디지털화하여 온라인으로 공개했다. 누구나 인터넷으로 임윤지당의 저술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2020년 한국여성문학인회는 임윤지당을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조선의 페미니스트, 임윤지당을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임윤지당의 현대적 의미를 탐구했다. 일부 학자들은 임윤지당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 제작을 제안하고 있다.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은 여러 차례 드라마화되었지만, 임윤지당은 아직 대중 문화 콘텐츠로 제작되지 않았다.

마무리

임윤지당은 조선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성리학자로, 19세에 결혼하여 8년 만에 과부가 되었고 딸마저 잃었지만 46년간 홀로 살며 성리학을 연구하여 『윤지당유고』를 남겼다. "남녀는 하늘로부터 동등한 성품을 받았으므로 여성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혁명적 주장으로 조선 사회의 성차별에 도전했으며, 강정일당이 그녀를 사숙하여 여성 성리학자의 계보를 이었다.

신사임당, 강정일당과 함께 조선 3대 여성 지식인으로 꼽히지만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21세기 들어 페미니즘의 선구자로 재평가되고 있다.

문헌 출처

<1차 사료 (정사 및 문집)>

1. 임윤지당,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 1796년 간행본

2. 임성주, 『녹문집(鹿門集)』

3. 임정주, 『운호집(雲湖集)』

4. 신광유, 문집 일부

5.『영조실록(英祖實錄)』

6.『정조실록(正祖實錄)』

<2차 사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윤지당(任允摯堂)" 항목, 한국학중앙연구원

2. 한국고전번역원, 『윤지당유고』 번역본, 2008

3. 이덕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김영사, 2000

4. 이숙인, 「임윤지당의 성리학 사상 연구」, 『한국철학논집』 15, 2003

5. 김영숙, 「임윤지당의 생애와 학문」, 『한국여성철학』 4, 2005

6. 정지영, 「임윤지당 문학의 성리학적 세계관」, 『한국한문학연구』 38, 2006

7. 조혜란, 「임윤지당의 여성 인식과 페미니즘 사상」, 『여성문학연구』 20, 2008

8. 송지원, 「임윤지당과 강정일당의 비교 연구」, 『한국여성학』 26, 2010

9. 박혜숙, 「임윤지당의 『윤지당유고』 연구」,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25, 2012

10. 이혜순, 「조선 여성 성리학자의 계보: 임윤지당에서 강정일당으로」, 『유교사상연구』 55, 2014

11. 원주시청, 「임윤지당 헌다례」 자료집, 2007-2020

12. 원주문화원, 『원주의 인물: 임윤지당』, 2010

13. 문화관광부, "2005년 5월 문화인물: 임윤지당", 보도자료, 2005.05

14. 연합뉴스, "조선 최초 페미니스트 임윤지당", 2016.03.08

15. 국립중앙도서관, 『윤지당유고』 디지털 아카이브, 2019

16. Im, Yunjidang, "Women Can Become Sages", Korean Philosophy Studies, 2007

17. Lim, Sungjoo, "My Sister, the Confucian Scholar", Joseon Dynasty Intellectual History,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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