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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열전 071] 송덕봉 – 시로 남편을 가르친 후기 여류시인

by 느티나무곽교수 2025. 12. 20.

조선 최초로 생전에 개인 문집을 가진 여성이자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이름·자·호를 모두 갖춘 인물이다. 남편 유희춘의 19년 유배를 함께 견뎌내며 시로 교류했고, "남편도 할 도리를 다하시오"라고 당당하게 권리를 주장했다. 허난설헌과 교분이 있었고, 남편의 시를 첨삭해줄 정도로 문학적 조예가 깊었으나, 생전 문집은 전하지 않는다. 과연 송덕봉은 누구였을까.

1. 출생과 성장

1.1. 홍주 송씨 명문가의 막내딸

송덕봉은 1521년(중종 16년) 전라남도 담양군 대곡면 천변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종개(鍾介), 자는 성중(成仲), 호는 덕봉(德峰)이다. 본관은 홍주(洪州)다. 여성으로서 이름과 자와 호를 모두 가진 것은 조선시대에 매우 예외적인 일이었다. 조선 500년 동안 스스로 호를 지은 여성은 10여 명에 불과했다. '덕봉'은 그녀가 태어난 집 뒤편 산 이름으로, '덕이 있는 봉우리'라는 의미다.

아버지 송준(宋駿, 1477-1549)은 1507년(중종 2년) 생원시에 합격한 후 호조좌랑, 사헌부감찰, 사옹원판관 등을 역임했다. 어머니는 함안 이씨로, 3남 2녀를 두었는데 덕봉은 막내였다.

홍주 송씨는 담양의 대표적인 양반가로, 자녀 교육을 매우 중시했다. 딸들에게도 경서와 사서를 가르쳤으며, 시문을 익히도록 했다. 당시 대부분의 양반가 여성들이 바느질이나 집안일만 배웠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1.2. 여성 선비로의 성장

송덕봉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천성이 명민했다. 경서와 사서를 두루 섭렵했고, 시문에 뛰어났다. 당대 기록에 "여사(女士)", 즉 여성 선비로서의 풍모가 있었다고 전한다. 특히 아버지 송준은 막내딸 덕봉의 재능을 아끼고 장려했다. 당시 양반가에서도 딸의 문학 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홍주 송씨 가문은 여성도 학문을 해야 한다는 진보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덕봉은 친정에서 시문을 배우고 익히는 동안, 조선 사회가 요구하는 유교적 덕목도 함께 습득했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순종적인 여성이 아니라, 배운 것을 실천하되 자신의 목소리도 낼 줄 아는 주체적인 인물로 성장했다.

1.3. 사대부가의 이상적 여성상

덕봉이 성장한 16세기 전반은 아직 조선 후기와 같은 경직된 가부장제가 정착되기 전이었다. 처가살이가 일반적이었고, 여성의 재산권도 인정되었으며, 여성이 제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덕봉은 유교적 덕목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는 조선시대가 추구한 유교적 여성 교육을 받은 엘리트 여성이면서, 동시에 배운 덕목을 일상에서 진정성 있게 실천하고자 한 실천적 지성인이었다.

 

2. 결혼과 처가살이

2.1. 유희춘과의 혼인

1537년(중종 32년), 송덕봉 17세에 유희춘(柳希春, 1513-1577)과 혼인했다. 유희춘은 덕봉보다 8세 연상이었다.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이다.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전라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유희춘의 할아버지는 유공준, 아버지는 유계린이며, 외할아버지는 『표해록』을 지은 최부다.

명문가 출신으로 1537년 25세에 생원시, 1538년 26세에 문과에 급제한 수재였다. 혼인 방식은 당시 전통대로 신랑이 신부 집으로 장가를 오는 형태였다.

유희춘은 해남에서 담양 처가로 장가를 왔고, 이후 평생 처가에서 살았다. 이는 조선 후기와 달리 16세기에는 처가살이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혼인 당일, 송준은 사위가 쓴 '금슬백년(琴瑟百年)'이라는 시구를 보고 "어진 사위다!"라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실제로 두 사람은 평생 금슬이 좋았다.

2.2. 양재역 벽서사건과 유배

결혼 후 10년간은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유희춘은 홍문관 수찬, 무장현감, 사헌부 정언 등을 역임하며 순탄한 관료생활을 했다. 하지만 1547년(명종 2년), 유희춘 35세 때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었다.

경기도 과천 양재역에 "위로는 여주(女主, 문정왕후),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익명의 벽서가 발견된 사건이다.

이는 외척으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 세력이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으로, 정미사화라고도 불린다. 유희춘은 해남이 제주도와 가깝다는 이유로 함경도 종성(鍾城)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위리안치란 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두는 형벌이다.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이었다.

2.3. 19년 유배, 함께 버틴 부부

유희춘은 1547년부터 1566년까지 19년간 종성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이 기간 동안 송덕봉은 담양 처가에서 홀로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집안을 지켰다. 두 사람은 헤어져 있었지만, 끊임없이 편지와 시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나눴다. 이것이 두 사람이 '별거부부'임에도 금슬이 좋았던 비결이다.

유희춘은 유배지에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했다. 국경 지방에는 학문하는 선비가 없었기에, 그는 변방의 젊은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가 유배를 온 후 많은 젊은이들이 학문을 하게 되었다.

한편 1555년(명종 10년) 경, 유배지에서 유희춘은 여종을 첩으로 삼았다. 이는 덕봉이 직접 골라준 여종이었다. 첩은 딸 4명을 낳았다.

2.4. 시어머니의 삼년상

1558년(명종 13년), 덕봉의 시어머니가 사망했다. 남편은 유배 중이고, 아들도 없는 상황에서 며느리인 덕봉이 홀로 장례를 치러야 했다. 덕봉은 예법에 따라 지성으로 장례를 치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삼년상을 치른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도 삼년상이 일반화되지 않았는데, 여자의 몸으로 시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른 것은 매우 예외적인 일이었다. 이는 덕봉이 성리학적 덕목을 얼마나 진정성 있게 실천했는지를 보여준다.

남편 유희춘은 훗날 아내를 중국 당나라 문종 때 효성으로 뛰어난 상곡부인(上谷夫人)에 비유하며 극찬했다.

2.5. 해배와 재회

1567년(선조 즉위년),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면서 유희춘은 19년 만에 해배(解配)되었다. 55세의 나이였다.

11월 5일 이른 새벽, 유희춘은 한양에서 파루 종소리를 들으며 복직을 기뻐하는 시를 지었다. 남쪽바다 북쪽 바다 쓸쓸한 땅에 23년 동안 버려뒀던 몸 옛 친구 생각하며 쓸쓸히 문적부만 읊고 고향 오니 어느덧 도끼자루 썩은 사람과 같다

「해배(解配)」 중에서 유희춘은 해배 후 사헌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전라도 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하지만 관직으로 인해 다시 집을 자주 비웠고, 부부는 여전히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다.

 

3. 시로 나눈 부부애

3.1. 지음(知音)으로 부른 남편

송덕봉과 유희춘은 서로를 '지음(知音)'이라 불렀다. 지음이란 나를 알아주는 친구, 나의 소리를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단순한 부부 관계를 넘어 정신적 동반자였다. 두 사람은 평생 수많은 시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유희춘의 『미암일기』에는 부부가 주고받은 시와 편지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어느 겨울날, 유희춘이 덕봉에게 시를 보냈다. 눈이 내리니 바람이 더욱 차가워 그대가 추운 방에 앉았을 것을 생각하노라 이 술이 비록 하품이지만 차가운 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으리 송덕봉은 즉시 화답했다. 국화잎에 비록 눈발이 날리지만 은대(승문원)에는 따뜻한 방이 있으리 차가운 방에서 따뜻한 술을 받으니 속을 채울 수 있어 매우 고맙지요

3.2. 남편의 시를 첨삭하는 아내

놀라운 것은 덕봉이 남편의 시를 첨삭해주었다는 점이다.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시를 지었더니, 덕봉이 '직설하여 문장을 쓰듯 시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산에 오르고 바다를 건너는 것으로 시작하여 끝에 가서 벼슬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내가 놀라서 부인의 말을 따라 시를 다시 지었다."

조선시대 남편이 아내의 문학적 조언을 듣고 시를 고쳐 쓴 것은 매우 예외적인 일이다. 이는 덕봉의 문학적 조예가 남편보다 뛰어났음을 의미한다. 유희춘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문인이었다. 그런 그가 아내의 조언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위계적이지 않고 평등했음을 보여준다.

3.3. 생전에 받은 『덕봉집』

유희춘은 아내의 시 38수를 모아 『덕봉집(德峰集)』을 편찬하여 생전에 선물했다. 조선시대 여성이 생전에 개인 문집을 받은 것은 송덕봉이 최초였다. 안타깝게도 이 초간본 『덕봉집』은 전하지 않는다.

현재 전하는 『덕봉집』은 유희춘의 『미암일기』와 『미암집』에서 덕봉의 시 25수와 행적을 발췌하여 2012년 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이 편찬한 것이다. 원래 38수였는데 25수만 남은 것은 많은 작품이 소실되었음을 의미한다. 유희춘이 일기에 기록하지 않은 덕봉의 시는 영원히 사라졌다.

 

4. 당당한 여성상

4.1. "남편도 할 도리를 다하시오"

송덕봉의 가장 큰 특징은 당당함이다. 조선시대 여성으로서는 매우 보기 드문 태도였다. 1573년(선조 6년) 경, 덕봉은 친정아버지 송준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려 했으나 비용이 부족했다. 오빠들도 곤궁하여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덕봉은 남편에게 편지를 보내 도와달라고 청했다. 유희춘은 비석 이야기는 빼고 가정의 화목함만을 언급하며 답장했다.

이에 덕봉은 「차미암운(次眉巖韻)」이라는 시를 지어 남편을 질책했다. (가정의) 화목함을 세상에 자랑하지 말고 정말 나를 생각한다면 착석문을 읽어 보십시오 군자라면 융통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편지도 함께 보냈다. "당신이 장가오던 날 아버지가 '금슬백년'이란 시구를 보고 어진 사위라며 아꼈습니다.

특히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당신은 함경도 종성에 귀양 가 있고 돌봐주는 사람 없었지만, 저는 예법에 따라 지성으로 장례를 치렀고 홀로 3년 상까지 지냈습니다. 사대부 여인으로 해야 할 도리를 다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장인이 사망했을 때 삼 년 안에 한 번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습니다."

유희춘은 할 말이 없었다. 아내의 말이 옳았다. 그는 덕봉의 의견을 받아들여 장인의 비석을 세우는 것을 도왔다.

4.2. "혼자 잤다고 자랑 마시오"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유희춘이 한양에서 혼자 관직 생활을 할 때,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는 한양에서 혼자 지내는 동안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소." 일반적인 조선시대 여성이라면 "남편이 정절을 지켜주어 고맙다"고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덕봉의 답장은 달랐다. "예순의 나이에 혼자 잤다면 스스로 기운을 위해 이로운 것이지, 제게 어려운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닙니다." 유희춘이 60세가 넘어 혼자 잔 것을 마치 아내에게 은혜를 베푼 것처럼 말하자, 덕봉은 "그것은 당신 건강을 위한 것이지 내게 은혜가 아니다"라고 일침을 놓은 것이다.

이러한 당당함은 당시 유교적 규범에서 보면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덕봉은 자신이 시어머니 삼년상을 치르고 집안을 지켰기에 남편에게 당당할 수 있었다.

4.3. 첩과 얼녀들을 품은 포용력

덕봉의 또 다른 면모는 포용력이다. 남편이 유배지에서 첩을 들이고 딸 4명을 낳았을 때, 덕봉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가족 질서에 편입시켰다. 사실 유배 길에 시중들 여종을 직접 골라준 사람도 덕봉이었다. 19년간 유배생활을 하는 남편을 돌볼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첩이 딸들을 낳자, 덕봉은 이들을 자신의 딸처럼 보살폈다. 첩에게 나름의 역할을 부여하고, 얼녀들이 가족 구성원으로 생활할 수 있게 했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조선시대 여성들이 첩과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덕봉은 가족의 질서를 정립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실천했다.

4.4. 외손녀 교육

덕봉은 외손녀 은우(恩遇)를 데리고 살면서 성리학적 교육을 강화했다. 당시 혼인 후 처가거주가 일반적이었기에, 친손녀는 외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서 곁에 있는 외손녀를 교육한 것이다. 어린 은우는 덕봉의 교육을 충실히 받아들였다.

한번은 은우의 얼이모(庶姨母, 유희춘 첩의 딸)가 남편과 사별한 후 재혼하려 하자, 어린 은우가 이모에게 "남편은 하나뿐이므로 두 명의 남편을 얻는 일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질책했다. 이는 성리학적 여성관이 얼마나 철저히 교육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덕봉은 자신의 생각을 손녀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

5. 작품 세계

5.1. 전하는 작품

현재 전하는 송덕봉의 시는 25수다. 유희춘의 『미암일기』와 『미암집』에 기록된 것만 남았다. 원래 38수였으나 13수가 소실되었다. 주제는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뉜다. ① 부부간의 애틋한 정 ② 가족애 ③ 자연경물에 대한 관조 ④ 술을 통한 심경 표출 ⑤ 세시풍속에 대한 관심

5.2. 대표작

5.2.1. 「지락음(知樂吟)」

부부가 함께 지은 연작시 중 일부다. '즐거움을 아는 노래'라는 제목처럼, 부부가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내용이다. 유희춘이 먼저 시를 지으면 덕봉이 화답하는 형식이다. 담양 미암박물관 뜰에는 이 「지락음」 시비가 세워져 있다.

5.2.2. 「차미암운(次眉巖韻)」

앞서 소개한, 남편에게 친정아버지 비석을 세워달라고 요청하는 시다.

(가정의) 화목함을 세상에 자랑하지 말고 (莫誇和樂世無倫)

정말 나를 생각한다면 착석문을 읽어 보십시오 (念我須看斲石文)

군자라면 융통성이 있어야 합니다 (君子蕩然無執滯)

이 시는 덕봉의 당당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남편을 설득하고 있다.

5.3. 문학사적 의의

송덕봉의 문학적 성취는 여러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첫째, 조선 최초로 생전에 개인 문집을 가진 여성이다.

둘째, 부부가 평등한 관계에서 시로 교류한 사례다.

셋째, 남편의 시를 첨삭할 정도로 문학적 조예가 깊었다.

넷째, 덕봉 연구에 최고 학자인 김수희 서울대학교 교수는 "시어 사용이 조선 여류시인 중 최고"라고 평가했다.

다섯째, 신사임당, 허난설헌과 함께 16세기 3대 여성 문인으로 꼽힌다.

6. 허난설헌과의 교분

6.1. 동시대를 산 두 여성

송덕봉(1521-1578)과 허난설헌(1563-1589)은 동시대를 살았다.

덕봉이 42세 연상이었지만, 두 사람은 개인적 교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 모두 뛰어난 시재를 가졌고,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호를 가졌으며, 문집을 남겼다. 하지만 삶의 궤적은 매우 달랐다.

송덕봉: 명문가의 딸 평생 금슬 좋은 부부생활 생전에 문집 받음 58세 장수

허난설헌: 명문가의 딸 불행한 결혼생활 사후 동생이 문집 출판 27세 요절

덕봉은 유교적 덕목을 실천하며 안정적인 삶을 살았지만, 난설헌은 불행한 결혼과 자녀의 죽음으로 고통받았다. 덕봉의 시가 밝고 긍정적이라면, 난설헌의 시는 어둡고 한(恨)이 서려있다.

6.2. 16세기 여성의 두 가지 길

두 사람의 대조는 16세기 조선 여성이 걸을 수 있는 두 가지 길을 보여준다.

덕봉의 길: 유교적 규범을 충실히 실천하되,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며, 남편과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길

난설헌의 길: 유교적 규범에 억압받으며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시로만 한(恨)을 표출하다 요절하는 길

물론 이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운명의 문제였다. 덕봉은 좋은 남편을 만났고, 난설헌은 그렇지 못했다. 시대가 여성에게 허락한 행복의 양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7. 죽음과 유산

7.1. 58세의 생애

송덕봉은 1578년(선조 11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 유희춘이 1577년 65세로 사망한 지 1년 후였다.

평생을 함께 한 부부는 1년 차이로 세상을 떠났다. 덕봉의 묘는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에 있다. 남편 유희춘의 묘와 나란히 있으며, 미암박물관에서 가까운 곳이다.

7.2. 미암일기에 기록된 여성

덕봉의 행적은 대부분 남편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미암일기』는 1567년부터 1577년까지 11년간의 기록으로, 조선시대 개인 일기 중 가장 방대한 것으로 평가된다.

미암일기는 본래 14책이었으나 현재 11책과 부록이 전해진다. 보물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 훼손된 선조실록을 복원할 때 참고자료로 쓰였을 정도로 꼼꼼한 기록이다. 덕봉의 시와 편지, 행적이 미암일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송덕봉이라는 인물을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 여성의 목소리가 얼마나 쉽게 지워졌는지를 보여준다.

미암일기(유희춘)
미암일기(유희춘)

7.3. 21세기의 재발견

송덕봉은 오랫동안 잊혀진 인물이었다.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에 비해 훨씬 덜 알려졌다. 생전 문집이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2년 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이 『국역 덕봉집』을 출간하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015년에는 담양 미암박물관 내에 덕봉 도서관이 개관했다.

2017년 12월에는 담양군 주최로 '조선의 여류작가 송덕봉의 삶과 문학' 학술대회가 열렸다. 전국 대학 교수 6명이 발제했으며,

특히 서울대 김수희 교수는 "16세기 한중 여성문인의 비교"를 주제로 송덕봉과 중국 여성시인 황아(黃娥)를 비교 연구했다. 2019년에는 모현관(慕賢館)이 등록문화재로 지정 예고되었다. 모현관은 유희춘의 고적 관련 수장시설로 1957년 건립되었으며, 화재와 도난 방지를 위해 연못 한가운데 지은 것이 특징이다.

8. 역사적 재평가

8.1. 16세기 여성의 가능성

송덕봉의 삶은 16세기 조선 여성에게도 가능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와 달리 16세기는 아직 가부장제가 완전히 경직되지 않았다. 처가살이가 일반적이었고, 여성의 재산권과 제사권도 인정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덕봉은 유교적 덕목을 실천하면서도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남편과 평등한 관계를 유지했고, 문학적으로도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여성에게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덕봉은 명문가의 딸로 태어나 교육을 받았고, 좋은 남편을 만났다.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8.2. 유교적 여성관의 양면성

송덕봉은 유교적 덕목을 철저히 실천한 여성이었다. 시어머니 삼년상을 치렀고, 남편의 19년 유배를 견뎌냈으며, 첩과 얼녀들을 품었다. 외손녀에게 성리학적 여성관을 엄격히 교육했다.

일부 학자들은 덕봉이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억압한 것은 아닌가 비판한다. 특히 어린 외손녀 은우가 얼이모의 재혼을 반대하도록 교육한 것은, 여성의 재혼을 금지하는 조선 후기 가부장제를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덕봉은 유교적 덕목을 실천했지만, 동시에 그것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근거로 삼았다. "나는 시어머니 삼년상을 치렀으니 당신도 장인 제사를 지내시오"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이는 유교 이념을 여성에게 유리하게 활용한 사례로 볼 수 있다.

8.3. 부부 평등의 가능성

송덕봉과 유희춘의 관계는 조선시대에도 부부 평등이 가능했음을 보여준다. 유희춘은 아내의 문학적 조언을 받아들였고, 아내를 '지음(知音)'으로 존중했다. 물론 이는 유희춘이라는 개인의 성품 덕분이기도 하지만, 16세기 사회 분위기도 작용했다.

당시는 아직 조선 후기와 같은 경직된 남녀 위계가 정착되기 전이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성리학이 강화되면서 여성의 지위는 급격히 하락했다. 처가살이는 사라지고 시가살이가 일반화되었으며, 여성의 재산권과 제사권은 박탈되었다. 과부의 재혼은 금지되었고, 여성의 교육도 축소되었다.

송덕봉과 같은 여성은 조선 후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녀의 삶은 16세기라는 특수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8.4. 작품 소실의 비극

송덕봉은 생전에 『덕봉집』을 받았지만, 이 초간본은 전하지 않는다. 38수였던 시는 25수만 남았다. 나머지 13수와 수많은 편지, 산문은 영원히 사라졌다.

이는 조선시대 여성 문학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무시되고 소실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남편이 소중히 여겨 문집을 만들어주었는데도, 후손들은 그것을 보존하지 않았다. 여성의 글은 보존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진 것이다.

만약 『덕봉집』 초간본이 전했다면, 송덕봉은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만큼 유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이 소실되면서 그녀는 400년 동안 잊혀졌다.

5. 현대적 의미

송덕봉의 삶은 현대 여성에게도 시사점을 준다.

첫째, 규범을 실천하되 자기 권리도 주장하는 균형감각이다. 덕봉은 시어머니 삼년상을 치렀지만, 그것을 근거로 남편에게 장인 제사를 요구했다. 의무를 다한 만큼 권리도 주장한 것이다.

둘째, 부부 관계에서의 정신적 동반자 의식이다. 덕봉과 유희춘은 서로를 지음(知音)으로 존중했다. 단순한 부부가 아니라 서로의 소리를 아는 친구였다.

셋째, 여성도 학문하고 글 쓸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덕봉은 시를 썼고, 남편의 시를 첨삭했으며, 생전에 문집을 받았다. 이는 여성도 지성인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넷째, 여성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의 중요성이다. 덕봉의 글이 남은 것은 오직 남편이 일기에 기록했기 때문이다. 여성의 목소리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보존하지 않으면 쉽게 사라진다.

마무리

송덕봉은 조선 최초로 생전에 문집을 받은 여성으로, 남편 유희춘의 19년 유배를 견디며 시어머니 삼년상을 홀로 치렀고 남편의 시를 첨삭할 정도로 문학적 조예가 깊었다. "남편도 할 도리를 다하시오"라고 당당히 권리를 주장했으며, 허난설헌과 교분이 있었으나 생전 문집은 전하지 않고 『미암일기』에 기록된 25수만 남았다.

16세기 처가살이 문화 속에서 부부 평등이 가능했던 특수한 시대의 여성이었으며, 유교 덕목을 실천하되 자기 권리도 주장하는 균형감각을 보여주었지만, 작품 소실로 400년간 잊혀졌다가 21세기에 재발견되었다.

문헌 출처

<1차 사료 (정사 및 문집)>

1. 유희춘(柳希春), 『미암일기(眉巖日記)』, 1567-1577년, 보물 제260호

2. 유희춘, 『미암집(眉巖集)』

3. 『선조실록(宣祖實錄)』

4.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2차 사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송덕봉(宋德峰)" 항목, 한국학중앙연구원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희춘(柳希春)" 항목, 한국학중앙연구원

3. 한국고전번역원, 『국역 미암일기』, 전 8권, 2000-2002

4. 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국역 덕봉집』, 2012

5. 정병설, "송덕봉의 삶과 문학",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25, 2012

6. 김수희, "16세기 한중 여성문인의 비교: 송덕봉과 황아", 『여성문학연구』 42, 2017

7. 정지영, "송덕봉 시의 특징과 문학사적 의의", 『한국시가연구』 43, 2017

8. 박혜숙, "『미암일기』에 나타난 송덕봉의 여성 정체성", 『고전문학연구』 48, 2015

9. 조윤희, "송덕봉의 가족 관계와 유교적 실천", 『한국여성학』 33, 2017

10. 담양군청 문화관광, "송덕봉과 미암박물관", 공식 자료, 2019

11. 문화재청, "담양 모현관(慕賢館)", 등록문화재 예고, 2019

12. 담양군, "조선의 여류작가 송덕봉의 삶과 문학" 학술대회 자료집, 2017

13. Song, Deokbong, "Poetry Exchange with Husband", Korean Classical Women's Literature,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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